우리가 지니고 사는
소금의 질량
지요하
(소설가,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공동대표)
오늘 이 자리에는 소금 알갱이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우리는
‘소금’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소금의 성분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소금의 성분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소금은 예수님 시대에 매우 귀한 사물이었습니다. 오늘처럼 염전이나 가마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소금이 아니었습니다. 수만 년 전 지각변동에 의해 육지에 갇힌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남게 된 염분이 응고된 형태의
소금이었습니다. 그 소금을 먼 곳에서 채취해 오기 때문에 공력과 비용이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소금은 왕실에서 관리를 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또 예수님 시대에는 염장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 소금이 사물을 썩지 않게 하는 용도로는 많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주로 음식의 맛을
내는 데에 많이 활용되었지요.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모든 음식 맛의 기본은 소금입니다. 일단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야 음식은 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맛이 조화를 이루어야 음식다운 음식이 되는데, 그 조화의 기본은
소금이지요.
그런데 인류가 소금을 섭취한 기간이 그리 오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체는 소금의
해독을 제어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소금의 해독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는 쪽으로 인체가 진화를 하려면 수만 년이 더
필요하리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무튼 소금은 사물을 썩지 않게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고 또 음식 맛을 내려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기본적인 재료이지만, 과잉 섭취는 금물입니다. 소금의 과잉 섭취는 인체의 건강을 해치는 지름길이지요. 오죽하면 소금이
‘만병의 원인’이라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현명한 사람이라면 ‘사람 잡는 설탕’, ‘만병의 원인 소금’이라는 말을 명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설탕과 소금의 과잉 섭취로 성인병이 창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진짜 소금의
성분을 지닌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맛의 조화를 이룬 갖가지 진미들을 열심히 즐기며 사는 사람들은 많고 많건만,
소금 성분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역설이 오늘의 시대 풍경인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바닷물을 구성하는 수만 가지 성분 중에 염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3%라고 합니다. 고작 3%의 염분이 바닷물을 짜게 하고 썩지 않게 한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어떤 이는 3% 소금의 가치를 얘기합니다. 이 세상에 소금 성분을 지닌
사람들이 3%만 있어도 이 세상은 썩지 않고 늘 정화의 파도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얘기지요. 또 어떤 이는 종교를 가진 신앙인들 중에 소금
성분을 지닌 3%의 신앙인만 있어도 그 종교는 세상에서 나침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얘기를 합니다.
한국은 종교가 많고 종교인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한국인의 특성 중 하나가 종교적
심성이라고 합니다. 종교적 심성이 탁월하게 발달한 민족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국민 대다수가 갖가지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국민보다
종교를 가진 국민이 월등히 많습니다.
그리스도교도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를 합하면 전체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입니다. 세계 50대 대형교회들 중에 절반에 가까운 23개를 한국의 개신교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1
· 2 · 3위를 비롯하여 세계 10대 교회 안에 한국 개신교회가 다섯 개나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형교회도 많고 성공한 목사님들도 많다 보니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비리도
생겨납니다. 교회를 세습하는 일도 생겨나고, 여의도 순복음교회처럼 교회 재산을 둘러싼 가족 간의, 또 신도들 간의 법정 싸움도
발생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교회세습도, 또 북한에서 행해지고 있는 3대 권력세습도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의 과잉적인 종교적 심성, 맹목적인 충성심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한국 대형교회의 세습이나 북한의
권력세습이나 종교적 심성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는 얘기지요. 이 일맥상통 속에는 남한의 박정희교, 유신공주의 집권도 포함이
됩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 가톨릭교회도 이 한국 땅에서 500만 명 시대를 열었습니다.
전체 국민 5천만 명 중에 10분의 1에 달하는 500만 명이 천주교 신자라는 얘기입니다. 열 명 중에 한 명이 천주교 신자라니, 놀라운
수치입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 500만 명 중에 소금 성분을 지니고 사는 신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반짝거리는 소금덩이로 갖가지 형태의 액세서리를 만들어 몸에 붙이고 사는 신자들이야 많지만, 진짜 소금 성분을 지니고 사는
신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입니다.
소금덩이로 만든 갖가지 형태의 액세서리를 몸에 붙이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진짜
소금 성분이 뭔지에 대한 관심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뚤어진 지나친 관심으로 진짜 소금 성분을
지닌 사람들을 방해하고 핍박하는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런 사람들을 심심찮게 목도하며 삽니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시국미사를 쫓아다니며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당 앞에서 시국미사 규탄집회를 열곤 합니다. 자기들끼리만 하기는 힘이 부친 듯 고엽제
군복들과 합세하여 소란을 피웁니다. 그들의 입에는 종북사제니, 위장사제니, 좌파신부니 하는 말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천박하고 살벌하고 폭력적인 말들을 새겨서 만든 피켓을 들고 심지어는
성품성사가 거행되는 거룩한 자리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들은 지난 1월 15일 천안시 유관순실내체육관에서 거행된 대전교구 사제서품식 자리에도
나타나 ‘종북사제척결’ 따위 천박하기 짝이 없는 글귀들을 적은 유인물을 대량으로 살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과연 온전한 천주교 신자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어디에서 자금을 조달받아 그런 짓을 하는지 짐작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 집단의 수뇌부의 면면들입니다. 그들은 과거 유신독재정권과 5공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천주교 신자라는
명함을 들고 독재권력에 빌붙어 갖은 호사를 다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걸림돌 구실을 했던
사람들이지요.
민주시민들의 고난,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눈물의 심연을 알 리 없는 그들은 오늘도
등 따습고 배부른 바리사이의 형색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의 본분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눈이 흐려진 교회 장상들도 여럿이나
됩니다. 눈이 흐려진 교회 장상들이 누구인지는 굳이 이름을 들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진짜 소금의 성분을 지니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만히 앉아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소금의 성분을 지닐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행동을 해야 합니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운동을 해야
바다의 청결한 염분이 유지되고 소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행동을 해야만 소금의 성분을 지닐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어 버려지고 맙니다. 오늘의 복음은 그 사실을 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짠 맛을 지닌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음식의 간을 맞추어 맛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의 요체는 스스로 소금의 성분을 갖추려는 자각과 노력입니다. 그리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파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행동들을 모아 파도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진정으로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우리가 새롭게 소금이 되기를 다짐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으로 가능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갱신과 희망의 종교입니다. 우리 다 같이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신앙을 추구하며 스스로 빛과 소금이 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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