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오현철/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
[2014년2월호] 조회 :
21 |
![](http://openjb.co.kr/bbs/skin/openjb/t.gif) |
![](http://openjb.co.kr/bbs/skin/openjb/t.gif)
작년 세밑에 한 대학생이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통해 우리들의 삶의 안녕을
물었다. 코레일 노조의 파업을 보고 쓴 이 글이 읽고, 각계 각층에서 그와 비슷한 물음들이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되물어졌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들이 귀결되는 곳은 정치일 것이다. 국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걱정하고 고민한다면, 그 국가의 정치는 틀림없이 국민들의 바람과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항쟁에서 전두환 군사정권에 승리한 이후로, 한국은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선출하였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도 달성하였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국가로 생각했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의 민주정부 10년을 지나면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피땀으로 이루어낸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미 반석에 올랐고 결코 퇴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안녕들하십니까’는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은 국가기구들이 불법으로 대선에 개입하고,
그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총장이 부당한 압력으로 옷을 벗고, 담당 검사는 좌천되고, 경찰 간부가 사건수사를 은폐하고 호도한 사실을 폭로한 수사
경찰은 승진에서 누락될만큼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가? (흔히들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라고 말한다. 한국 정당정치의 이면을 보자. ) 우리의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잘못되었다. 한국의 지배블럭이 비민주주의 세력이라는 점이
근본적이고 고질적인 정치적ㆍ사회적 비민주성의 원인이다. 지배블럭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기를 거치며 한국에 공고한 이데올로기
구축하였는데,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냉전반공주의였으며 경제발전이 아닌 재벌성장제일주의를 지향하였다. 지배블럭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지역적으로 영남지역에 기반한 정치인, 계급적으로 재벌 중심의 거대자본가, 친권위적ㆍ친자본적 속성을 체화한 고위관료들,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를
자가발전하는 일부 군부, 파시스트적인 주류 언론들, 보수적인 종교계와 학계가 주축이 되었다. 이들의 일관된 지배 전략은 대북 전쟁에 대한
공포심과 북한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하고, 민주 인사들을 빨갱이이나 종북으로 매도하고, 재벌경제의 성장만을 유일한 경제 대안으로 호도하고,
자신들의 탐욕과 실정을 지역감정으로 가리는 것이었다. 특히 선거전략은 지역분할과 지역감정 조장, 선거전과 후에 거짓말하기, 자신의 과오를 야당에
뒤집어씌우기였다. 지배블럭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강권으로 지배하였고,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근혜 정부에서는 집권
정당을 앞세워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강화하였다. 이들은 보수정당을 통해 시종일관 적대정치를 자행하였다. 대북 적대정치, 민주인사와 노동진영에 대한
적대정치, 호남 지역에 대한 적대정치가 그들 전략의 주축이었다. 최근에는 장기집권을 위해 민주주의 대신에 성장과 효율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려한다. 교학사 교과서 파동은 이들이 일제와 독재정권에 협력하였던 자신들의 과거를 미화하고, 성장과 효율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착취적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이에 대항하는 민주진영은 어떠하였던가? 잘 알다시피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87년 6월 항쟁,
2002년 촛불 시위의 주인공은 학생과 시민이었다. 소위 정통 야당은 언제나 저울추가 기울어진 후에야 광장에 끼어들었고, 시민들의 항쟁으로
열려진 정치적 기회구조의 과실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정책적 비전이나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야당은 대체로 지배블럭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야당의 맏형이라할 수 있는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시기에 경제정책에서 SK 분식회계 수사, 삼성애버랜드 수사에서
공공연하게 재벌편을 들었고, 동북아금융허브 건설, 한미 FTA, 비정규직 양산 등 재벌을 옹호하고 서민경제를 파탄내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지배블럭이 말하는 ‘사회의 메인스트림’을 뒤집을 것처럼 유세하던 노무현 후보는 당선된 이후 오히려 지배블럭의 이익을 앞장서서 보호하고
홍보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지배블럭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었다. 민심이 그 정부와 정당을 떠난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지금의 민주당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총선과 대선 기간에 민주당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였지만 근본적으로 재벌경제를
떠받치고 서민경제를 경시하는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던 ‘보편적 복지’의 진정성마저 의심스럽다. 보편적 복지가 그들의
신념이었다면 지배정당의 복지 공약 후퇴에 어찌 그렇게 한가하게 대응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학 교과서에서는 선거가 좋은 정당과 나쁜 정당을
가려내어 정치를 발전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선거는 정당 선별 기능을 상실하였다. 좋은 정당은 국민의 자유를
확장하고, 삶을 윤택하게하고, 시민들이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연대하도록 도와야 한다. 한국의 지배정당은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정책들만
시행하였다. 그럼에도 지배정당은 전쟁의 공포심을 조장하고 빨갱이ㆍ종복 몰이와 지역감정을 조장함으로써 표를 모으고, 민주당은 그러한 지배정당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으로 편하게 표를 모았다. 지배정당도 민주당도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흔히 ‘정당정치는
책임정치’라고 말하지만, 한국에서 그것은 전형적인 정치적 거짓말이다. IMF 이후로 우리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자살하고 있다. 거의 모든
연령층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잘못하여 민생이 파탄났다고 자살한 정치인을 보았는가? 스스로
국회의원직과 대통령직을 버린 정치인을 보았는가? 국가파탄 사태에 책임지고 자발적으로 해산한 정당을 보았는가? 우리 정치인들이 말하는 책임정치란
불법적이거나 부당하거나 무능한 정당이 선거에서 국회 의석 몇 석을 잃거나 청와대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국민들은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고 자살을 하는데 그깟 의석 몇 개와 청와대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책임졌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러고도 잘 살고 있고 다음 선거에 또다시
출마할 것이다. 너무나 뻔뻔한 거짓말이다. 지배정당, 민주당은 모두 국회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 정당들이다. 이들은 지금의
정치구도에서 과도한 특혜를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구도를 바꿀 생각이 없다. 새로운 사회와 더 나은 삶을 바란다면 우리는 새로운
정치지형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의 정치구도에 균열을 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배정당과 민주당의 중간 언저리에서 길을 잃은 안철수
신당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새로운 정치는 정당이라는 중간 매개자를 거치지 않고 시민이 직접
의사결정하는 정치를 필요로한다. 그러한 의사결정 방식은 이미 전세계에서 다양한 방법들이 채택되어 널리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서는 기존 정당의 적대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의사결정 단위를 작게 만들어 시민이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지역정치와 지역정당이
필요하다.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직접 묻고 그 의견에 따라 정치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정당이 전국에서 활성화되고 그 정당들이 연대할 때
기존 적대정치의 무책임과 무능을 극복하는 새로운 정치가 등장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지역정당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