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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독일 사회민주당① - 사회주의자탄압법에서 수정주의 논쟁까지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4. 1. 3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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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독일 사회민주당①

- 사회주의자탄압법에서 수정주의 논쟁까지

장석준(민주노동당 연수원 부장)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은 30년간의 끊임없는 투쟁과 희생 덕분에 세계의 다른 어떤 사회주의당도 이르지 못한 지위를, 짧은 기간 내에 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보장해줄 지위를 확보하였다. 사회주의 독일은 국제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영예롭고 가장 책임 있는 최전방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 F. 엥겔스, ?독일에서의 사회주의?(1891년), ?저작 선집? 6권 367쪽.


나는 히슈베르크(1907년)에 있을 때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볼셰비키 출판사를 위해 독일 사회민주당에 관한 책을 썼다. 그 속에서 나는 부르주아 사회가 위기에 빠지면 독일 사회민주당의 거대한 기구가 보수적 질서를 지탱하는 주요한 힘으로 밝혀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또다시 전개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이 이론적 가설이 어느 정도나 사실로 증명될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 L. 트로츠키, ?나의 생애? 상. 322쪽.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대중정당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1890년대 이후 수백만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가는 듯 보이던 사회민주당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F. 엥겔스를 비롯해서 전 세계 노동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역사 진보의 확고한 증거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민주당이 1914년 자국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평가는 정반대로 바뀐다. “배신자” ― 이 말만큼 이들에게 잘 들어맞는 말도 없는 듯 보였다. 아울러 사회민주당으로 대표되던 서유럽의 노동자정당운동 전반에 대해서도 비판과 회의가 등장했다. 이것이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양대 흐름,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역사적 분기점이라는 사실은 이제 세계사의 상식이다.

하지만, 창당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40여 년의 세월 동안 사회민주당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굴곡을 그려왔는지, 그리고 왜 이 당이 그런 길을 걸어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수정주의 논쟁에 대한 다분히 이론 중심적인 접근, 개혁 노선과 혁명 노선에 대한 도식적인 정리가 보다 깊은 관심과 고민을 가로막아왔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계급도 자신의 대중정당을 건설하고 나선 지금, 우리는 사회민주당의 한계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당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세계 좌파정당운동의 궤적을 살펴보는 이 기획도 독일 사회민주당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서 이뤄진 사회민주당의 성장


독일 최초의 공개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은 1863년 F. 라살레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독일노동자총연맹>이라는 이 조직은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고 국가의 힘을 빌어 노동자 생산협동조합을 도입하는 것을 주 노선으로 하였다. 그 무렵 독일의 정치판을 가르던 양대 세력은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은 대토지소유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프로이센의 군주정을 유지하려 했다. 반면, 신흥 부르주아지들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자들은 좀 더 민주적인 입헌군주정을 추구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던 라살레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주의자들과 타협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반대하는 또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1869년 <사회민주노동당>을 건설했다(아이제나흐에서 창당했기 때문에 ‘아이제나흐파’라고도 불렸다). K. 맑스, 엥겔스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던 W. 리프크네히트, A. 베벨 등이 이 당의 중심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회를 열기 위해서는 기존의 국가권력과 대결하고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맑스, 엥겔스의 정치노선에 충실했다. 그리고 독일 사회의 당면 과제는 부르주아민주주의 과제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할망정 보수주의자들과는 정면 대결하는 자세를 취했다.

1875년에 두 조직은 고타에서 합당대회를 열어 <독일사회주의노동당(독일어 약칭 SAP)>으로 통합한다. 하지만, 맑스가 고타 대회에서 통과된 당 강령을 신랄하게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두 당의 통합은 사실상 라살레파와 아이제나흐파 사이의 심각한 입장 차이를 ‘봉합’하는 데 그쳤다. 아무도 이 당이 과연 오래 갈 수 있을지 낙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SAP를 요절의 운명에서 구한 것은 뜻밖에도 정권의 공세였다. 1873년부터 유럽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의 전 세계적 대불황을 경험하고 있었다. 유럽 각국의 자본가들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모색에 나선다. 독점대자본의 주도로 중화학공업 분야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생산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제국주의’ 시대의 시작이었다.

1871년에 통일을 달성한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의 보수주의 정권이 앞장서서 독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고도화하려 했다. 이런 비스마르크 정권에게 최대의 방해 세력은 노동계급 정치세력, 즉 SAP였다. 창당 3년차를 맞은 SAP는 개신교 지역, 공업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일로에 있었다. 베를린, 함부르크 같은 대도시에서는 40%의 득표율까지도 기록했다. 비스마르크 정권은 SAP를 억압할 묘책을 궁리했다. 이 때 마침 한 무정부주의자가 독일 황제를 저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1878. 5. 11). 정부는 즉각 <사회주의자탄압법(이하 탄압법)>이라는 새로운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SAP의 모든 조직, 집회, 출판물을 금지한다는 게 법안의 골자였다. 이 법안은 그 지나친 반민주적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의회에서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달 뒤 다시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정부는 의회 해산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결국 그 해 10월 새 의회에서 이 법은 SAP와 가톨릭중앙당만 반대하는 가운데 통과되고 만다.

탄압법이 통과되자 SAP 의원들은 “우리는 이 법률 전체를 무시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불법화된 당 조직과 당 언론은 곧바로 지하활동에 돌입했다. 1880년 스위스의 비덴에서 열린 당대회에서는 “당은 ...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노력한다”는 고타 강령의 문구에서 “합법적인”이라는 말을 삭제하여 비합법투쟁을 내외에 천명했다. 지구당 조직 대신에 문화클럽, 여가클럽을 만들어 위장활동을 벌였고, 술집을 개점하여 회합 장소로 삼았다. 이 때문에 지역의 주요 활동가들이 술집 주인이 되는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각지에 산개한 조직들을 전국조직으로 통합하는 역할은 당신문인 <사회민주주의자(조치알 데모크라트)>가 맡았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스위스에 망명한 당원들에 의해 편집돼 국내로 밀반입되었고, 이 신문의 유통?배포가 SAP 하부 조직들의 최대의 임무가 되었다. 레닌의 <이스크라>는 바로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신의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그런데, 탄압법이 SAP 자체를 불법화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법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내건” SAP의 “조직, 집회, 출판물”만을 금지하고 있었다. 즉, SAP의 ‘원내’ 활동은 허용했던 것이다. 선거운동 조직조차 금지되었지만 어쨌든 선거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다. 이 점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후 발전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덴 대회의 결정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정권의 탄압에 직면한 SAP로서는 국가와 정면 대결하는 노선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와의 협력을 추구하는 라살레주의를 폐기하는 데는 더 이상 논쟁의 필요조차 없었다. 더구나 국외로 망명한 주요 활동가들은 외국에서 맑스, 엥겔스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그 영향력은 <사회민주주의자>를 통해 국내에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즉, 이념의 차원에서 SAP는 급진화되었다.

하지만, 실천의 차원에서는 이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탄압법 아래서 정치활동의 마당이 원내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선거에 의원으로 당선되는 것이 점점 더 중요시됐다. 이와 함께, 의원단이 실질적인 당 지도부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즉, 실천의 차원에서 SAP는 독일의 제도 정치에 점차 종속되는 양상을 보였다. 당의 이념과 실천이 서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첫 번째 시험 - 증기선보조금 논쟁


이러한 모순이 처음으로 폭발한 것이 1884년 증기선 보조금 논쟁이었다. 비스마르크 정권은 동아시아(조선을 포함)와 태평양을 운항하는 증기선 사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독일 생산품 시장을 확보하려는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SAP는 탄압법 실시 직후의 침체(81년 총선에서 득표율 25% 감소)를 딛고 다시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천 명 가량의 활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되는 와중에도 84년 총선에서 12석의 의석을 두 배인 24석으로 늘릴 수 있었다. 이 때 당선된 의원들에게 닥친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가 바로 증기선 보조금 법안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하는 문제였다.

맑스, 엥겔스의 반식민주의 입장을 따른다면 이 법안을 무작정 통과시켜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굳이 식민주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SAP는 정부의 모든 정책, 심지어는 사회보험제도의 도입에 대해서도 그 불철저성을 이유로 “완전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었다.

그런데, 의원단 내에서 증기선 보조금 법안에 대한 반대 입장은 베벨 등의 소수 의원에 그쳤다. I. 아우어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 의원은 법안에 호의적이었다. 식민정책을 둘러싼 암묵적인 입장차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지지 이유는 이 법안이 조선산업 경기를 활성화시켜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많은 SAP 의원들은 조선산업의 근거지인 함부르크 등의 항구도시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자기 지역구 유권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가장 중요한 판단 준거로 삼았다.

의원단 내부의 논쟁에서 소수파로 몰린 베벨은 G. 폴마르, E. 베른슈타인 등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진과 손잡고 의회 바깥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1885년 1월 스위스 쮜리히의 망명 당원들의 결의를 시작으로 각지의 당원들이 의원단 다수파를 반대하는 결의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의원단 다수파는 <사회민주주의자>가 당의 사실상의 지도부인 의원단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규율 문제를 들어 역공을 감행했다. 그러자 다시 각 지역 조직들이 당내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의원단의 월권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그 해 4월에 들어서서야 두 세력은 타협에 도달했다. 타협안의 내용은, 식민정책과 직결되는 항로는 반대하고 그렇지 않은 항로는 보조금 규모를 줄이는 한에서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석분포상 SAP가 이 당내 타협안을 최종 관철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의원단 전원이 법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됐다.  

논쟁의 최후 결과로만 보면 이는 당내 맑스주의 분파의 승리처럼 보인다. 실제로 1880년대 말부터는 베벨이 당의 핵심 지도자로서 위상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타협안은 유권자들의 지지 여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다수파 의원들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아우어파, 베벨파를 막론하고 선거에서 지지표를 늘리는 것을 일상 실천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기게 됐음을 의미했다.

또한, 이는 SAP를 지지하는 독일 노동계급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독일 노동자들은 탄압법의 시련 속에서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는 독일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의 형성과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통하여 세계대불황을 극복하면서 새로이 장기 성장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독일 노동자들은 한편에서는 미래에 닥칠 자본주의의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스마르크 정권 아래서의 경제 성장을 찬미했다. 그들의 비좁은 집에는 황제와 비스마르크의 초상이, 맑스, 엥겔스의 초상과 함께 걸려 있었다.


에르푸르트 강령의 모순


탄압법은 원래 2년 반 동안만 효력을 갖는 것을 전제로 한 한시적 법률이었다. 그러나, 원내 보수 세력은 3차례의 연장 결정을 통해 탄압법 체제를 12년간이나 지속시켰다. 새 황제가 등극하고 비스마르크가 권좌에서 물러난 1890년 1월에야 탄압법은 그 수명을 다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해 총선에서 SAP는 143만표(19.7%)를 득표하여 35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100만표 이상의 지지를 확보한 것이다.

엥겔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탄압법의 시련을 이겨낸 독일 노동자들을 칭송했지만, 탄압법이 SAP에 남긴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 탄압법에 대한 기억은 당원들 사이에 “탄압 공포증”이라고나 할 정서가 뿌리내리도록 만들었다. “조직을 지킨다”는 것이 어느새 당의 제 일 계명이 되었다. 조직을 지키고 선거에서 착실히 표를 늘려 가면 “언젠가는” 혁명이 닥친다는 게 독일 노동자들의 ‘신앙’이었다. 대규모 옥외 집회를 지레 두려워하고, 당원 자격도 불분명했으며, 탄압법의 잔재 때문에 중앙당과 지구당을 이어줄 광역지부 조직의 건설도 미뤄졌다. 열성당원의 비율은 대개 1~2%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증기선 보조금 논쟁을 계기로 부상한 일군의 청년 당원들이 당의 현실을 비판하고 나섰다. ‘청년파’라 불린 이들은 당장의 선거 승리와 의원단 활동이 마치 실천 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기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그들은 제도 정치에 종속되는 경향에 대한 반대 편향으로 제도 정치로부터의 철수를 주장했다. 청년파는 1888년 베를린 시의회 선거?프로이센주 주의회 선거에 보이콧을 주장했다. 1890년에 들어서서는 그 전 해 제2인터내셔널 첫 회의에서 결정된 메이데이 시위 계획을 파업 계획으로 발전시키자는 제안을 했다가 의원단과 충돌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결국 생디칼리즘 노선(노동조합이 직접 혁명 투쟁에 나서야 된다는 입장)으로 경도됐고, 결국 당에서 쫓겨나 <독립 사회주의당>이라는 소규모 독자정당을 창당했다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다음 해,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당은 새로운 도약을 선언했다. 당명은 <독일 사회민주당(독일어 약칭 SPD)>으로 바뀌었다. 비합법 신문인 <사회민주주의자> 대신 국내에서 발간되는 합법 신문 <전진(포어베르츠)>을 창간했다. 그리고 에르푸르트 강령이라 불리는 새 강령을 채택했다. 이 강령은 당의 궁극 목표를 밝히는 전반부와, 당면 실천 과제를 밝힌 후반부로 구성되었는데, 전반부는 당 이론지 <새 시대(노이에 차이트)>의 편집장인 K. 카우츠키가, 후반부는 당시까지도 입국이 금지되어 있던 망명 당원 베른슈타인이 작성했다.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밝힌 앞부분의 내용은 당이 드디어 ‘과학적 사회주의’를 완전히 수용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궁극 목표를 담은 전반부와 일상 투쟁 과제를 담은 후반부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격이 있었다. 일상 투쟁 과제들(보통선거권, 8시간 노동, 누진세 도입, 무상의료 등)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화”라는 목표를 실현하는 데 어떠한 의의가 있으며 어떠한 전망을 갖는 것인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았다. 이는 당시 SPD의 이론과 실천의 상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말로는 혁명을 주장하지만, 몸은 제도 정치에 붙박혀 있는 모습 ― 혁명은 하나의 ‘신앙’으로만 남고, 실제 관심 있는 것은 개혁 투쟁이었다. 그렇다고 개혁 투쟁에서 제대로 성과를 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SPD는 여전히 원내에서 상대적 소수 정당이었고, 그렇다고 입법 활동 이외의 다른 투쟁 수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 가지 편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이론 중심 편향, 혹은 이론적 기회주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당 이론가인 카우츠키였다. 그는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데 치중했다. 지금 당장 당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궁극 목표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지 하는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카우츠키가 다듬은 ‘신앙’은 당의 얼굴인 베벨을 통해 피와 살을 얻었다. 당대 독일 노동자의 전형이자 마지막까지 엥겔스의 가장 긴밀한 동지였던 베벨은 서로 분열된 SPD의 이론과 실천이 마치 통합된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베른슈타인의 문제제기, 수정주의 논쟁의 시작


또 다른 편향은 실천 중심 편향, 혹은 실천적 기회주의였다. 증기선 보조금 파동 때만 해도 베벨의 협력자였던 바이에른 SPD 지도자 폴마르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산업화의 정도가 아직 미약하고 중?소농 인구가 많았던 남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당은 노동계급만을 지지 기반으로 해서는 총선이나 지방의회 선거에서 당장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이런 조건에서 바이에른 SPD는 중앙당 방침과 상관없이 자유주의자들과 선거연합을 추진하거나 ‘농업의 협동조합화’라는 맑스, 엥겔스의 구상에 배치되는 중?소농 정책들을 선동하는 등 독자행동을 감행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에르푸르트 강령이 통과되기 직전에 폴마르는 이미 ‘엘도라도 연설’로 알려져 있는 두 차례의 연설을 통해 바이에른 당의 노선을 하나의 노선으로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연설에서 그는 에르푸르트 강령 후반부에 서술될 여러 당면 과제들 중에서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본 5가지 과제(노동자 보호 확대, 결사권의 실질적 쟁취, 국가의 쟁의 개입 금지, 반독점 입법, 식료품 관세 철폐 등)를 SPD의 행동강령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당이 이 요구들을 관철시키는 개혁 투쟁에 당 활동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폴마르는 당의 사회주의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는 다만 당이 솔직하게 당면 개혁 투쟁에 집중해야 하고,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중간세력과 제휴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러한 실천이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언급을 회피했다. 개혁 투쟁의 성과들이 과연 어떠한 사회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폴마르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누구는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라고 해라. 우리는 묵묵히 우리 길을 간다.” 이것이 남독일 SPD 당원들의 기본 정서였다.

잘 알려진 베른슈타인의 문제제기, 즉 수정주의의 출발은 바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18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카우츠키와 협력해 바이에른 SPD의 노선을 비판하던 베른슈타인은 독일 사회의 현실을 고민하면 할수록 오히려 폴마르파에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폴마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했다. 이론가인 그는 만약 당의 이론과 실천이 서로 어긋난다면 이론 자체를 ‘수정’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우직한 입장을 보였다.

1899년에 발표된 그의 저작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국역본: 한길사)는 베벨, 카우츠키의 정통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수많은 이론적 주장들을 담고 있지만, 그 핵심 결론은 하나로 집약된다. 자본주의가 계속 성장해가는(제국주의의 전성기인 1890년대 말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는 실제 그렇게 보였다) 현 상황에서는 노동조합의 단체협상과 사회민주당의 입법 활동을 통해 개혁을 쟁취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상 실천이며 이것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즉, 이제 더 이상 궁극 목표라는 짐 때문에 지금 여기서 우리가 벌이는 실천에 대해 고뇌할 필요가 없다. 현재 당이 벌여나가는 개혁 투쟁이 사회주의의 “전부”다. “내게는 운동이 전부다. 궁극 목표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베벨, 카우츠키 등의 이론적 기회주의자들에 비하면, 그리고 남독일 SPD의 실천적 기회주의자들에 비하면, 베른슈타인은 차라리 정직한 것이었다. 아니, 그의 수정주의는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며 활동하는 노동계급 대중정당, SPD가 처한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를 꿰뚫어본, 영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었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궁극 목표와 일상 실천 사이의 긴장을 한 쪽 항의 일방적 폐기로 잠재우려 했을 뿐이다. 이를 통해 단지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대한 고민을 손쉽게 지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개혁 투쟁만으로는 도저히 바꿔낼 수 없는 독일의 지배 체제(독점 자본가와 대지주-군부의 연합)를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 또한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이러한 그의 공격 앞에서 SPD 지도부의 대응은 다만 침묵과 무시였다. 당내 좌우 어디에도 베른슈타인 만큼의 용기와 안목은 없는 듯 보였다. 오직 당시 막 독일 거주 폴란드계 노동자들의 대표로 당 활동을 시작한 한 폴란드계 여성 운동가만이 사태의 본질을 직시했고, 논박의 포문을 열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자 룩셈부르크. 이미 1년 전 슈투트가르트 당대회에서 이 스물 일곱 살의 이방인 여성은 유럽 노동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 거대한 당에 다음과 같은 당돌한 진단을 내린 바 있었다.

“우리 당에서는 극히 중요한 문제가 흐지부지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목표와 일상 투쟁의 관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 이 글을 쓰는 데 다음의 연구 성과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강신준, ?수정주의 연구Ⅰ: 노농동맹 문제와 기회주의의 발전과정?, 이론과실천, 1991.

강철구,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념투쟁과 개혁주의(1890~1914)?,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논문, 1994.

김형태, ?사회주의자탄압법하의 독일사회민주당의 형성?,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3.

정대성, ?비스마르크의 증기선 보조금법안과 독일사민당의 위기, 1884~95?, 부산대 사학과 석사논문, 1996.

정현백, ?노동운동과 노동자문화?, 한길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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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독일 사회민주당

- 수정주의 논쟁에서 1914년 8월 4일까지


장석준 newer@jinbo.net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전호에 이어서)


‘어떤’ 개혁투쟁인가가 문제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에 반대하면서 개혁투쟁의 의의 자체를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다. 베른슈타인을 비판한 책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이 글의 제목을 처음 본 순간 놀랄지도 모른다. 사회 개혁이냐 아니면 혁명이냐?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개혁에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중략) 물론 그렇지 않다. 사회 개혁을 위한, 또 기존의 기반 위에서 노동하는 대중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그리고 민주적 제도를 위한 일상적인 실천 투쟁은 사회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지도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옮김, 책세상, 10쪽, 강조는 인용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오히려 개혁 투쟁이야말로 일상 시기에 사회민주당이 혁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이 문제되는 것은 그가 개혁 투쟁의 의의를 강조한 데 있지 않다. 그가 개혁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문제다. 그는 혁명적 전망을 의식적으로 포기함으로써만 당이 개혁 투쟁에 보다 충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으로 긍정되는 개혁 투쟁은 그 목표가 지극히 낮게 책정될 수밖에 없다. 당장 개혁의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제도 정치권 내에서 다수를 확보해야 하고 그러자면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협조가 필요하다. 자유주의 정당들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폴마르가 강조한 5가지 과제 같은 최소 강령만이 ‘현실적인’ 목표가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수정주의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이미 무기력한 신앙으로 전락해가고 있던 당의 전략적 과제, 즉 민주공화국 건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상으로부터 이제 완전히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럼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안은 무엇인가? 전략적 구상을 다듬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베벨, 카우츠키 등 구좌파의 노선에 다시 안주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슈투트가르트 당대회에서의 발언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개혁의 변증법적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을 당의 전략 구상의 핵심으로 보았다. 당의 일상 개혁 투쟁은 혁명적 전망 아래서 그것을 북돋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개혁 투쟁이 필요한 것인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단지 한 문장의 짤막한 언급만을 자신의 책에 남겨 놓았다.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 투쟁이 갖는 커다란 사회주의적 의미는,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인식과 의식을 사회화한다는 것이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1908년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화한다”는 다소 추상적인 문구 뒤에 이런 해설을 덧붙였다. “사회화한다, 즉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조직한다”.)

- 위의 책, 55쪽, 강조는 인용자. 


말하자면, 개혁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의 현실적 성과들이 아니다.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성장을 꾀하는 것이 당이 벌여나가야 할 일상 개혁 투쟁의 진정한 임무다. 이렇게 역사적 체험을 쌓아감으로써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위기 시기에 혁명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쟁취할 능력을 확보해나갈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개혁투쟁론은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그 단초가 나와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들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더욱더 확대되는 단결이다.

- ?저작선집? 1권, 409쪽, 강조는 인용자.


이제 문제는 이러한 개혁투쟁론을 사회민주당의 일상 활동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다. 하지만,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러한 실천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는 없다. 저자의 뛰어난 이론적 혜안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자신의 구상을 운동으로 펼쳐 보일 마당이 없었다는 점이다. 베른슈타인과 수정주의자들에게는 제도권 정치에 진출해 영향력을 발휘하던 남독일 사민당 조직이 버티고 있었지만, 폴란드 출신의 이 여성 망명 당원에게는 그런 기반이 없었다. ‘좌파’로 알려져 있던 베벨 등의 당권파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의를 당내 우파의 부상을 억제해줄 왼쪽의 평형추 정도로만 인정해줄 따름이었다. 이것이 새 세기(20세기)를 맞이하던 무렵, 유럽 최대 노동자정당의 상황이었다.


1905년 러시아로부터의 충격 - 정치총파업 논쟁


시대를 뒤흔드는 바람은 뜻밖에도 동쪽으로부터 불어왔다. 1905년 1월 러시아 페체르스부르크에서는 신부를 앞세워 짜르에게 청원하러 가던 한 무리의 노동자들에게 군대가 발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곧이어 짜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졌다. 파업투쟁은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지만, 놀랍게도 1년 넘게 계속됐고, 때로는 무장투쟁으로까지 발전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노동운동 혹은 사회주의운동을 접해보지 못했던 가장 낙후한 노동자층까지 투쟁에 결합했고, 심지어는 농민과 중산층까지도 합세했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봉기는 자신들이 걸어온 산길의 절정에서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주저앉아 있던 독일 노동운동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세 농노의 사촌뻘로 여겨졌던 ‘미숙한’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최초로 유럽에 혁명이라는 장관을 펼쳐 보인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한 편에서는 이를 최소한의 민주주의마저 허용되지 않는 동유럽 사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애써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에는 러시아 혁명의 투쟁 형태로부터 사회민주당의 활로를 찾아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정치총파업 전술이었다.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들에게 총파업은 경제투쟁의 한 전술로서만 의미를 지녔었다. 그들에게 정치투쟁이란 의회 진출 아니면 무장봉기였다. 정당운동을 불신하고 노동조합을 노동계급의 가장 중요한 조직적 수단으로 보는 프랑스, 이탈리아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만이 총파업을 정치투쟁의 무기로 생각했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정치총파업 전술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벨기에 총파업부터였다. 당시 유럽 많은 나라에서는 아직 보통선거권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해 권력으로 나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보통선거권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점차 정치총파업 전술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벨기에에 이어 스웨덴, 덴마크 등지에서 정치총파업이 시도됐고, 190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총파업투쟁이 일부 도시에서 무장항쟁으로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독일 노동운동의 분위기는 이런 흐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탄압법의 역사적 경험을 잊지 못하던 독일 노동운동에서는 정부의 탄압을 불러일으킬 선제공격은 시도하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1905년 1년 내내 유럽의 신문지상을 달군 러시아 혁명의 소식은 이런 분위기를 밑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누구보다도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 주위의 당내 좌파들이 정치총파업 전술의 채택을 들고 나왔다. 좌파는 총파업 시도를 통해 당의 전략적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 했다.

당시 독일도 보통선거권이 완전히 인정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성인 남성에 한정된 보통선거권은 그나마 제국의회 선거에서만 인정되었다. 프로이센 주의회 선거를 비롯한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소위 3계급 선거라는 계급별 선거가 치러졌다. 더구나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제국의원 선출에도 계급별 선거제도를 적용하려는 선거법 개악 시도를 되풀이했다. 좌파는 우선 선거법 개혁을 쟁점으로 해서 정치총파업을 시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독일 노동운동 내의 반응은 다양했다. 우선, 노동조합 간부들은 총파업 전술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는 광부파업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는 독일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업 물결로 이어졌다. 그러나, 노동조합 간부들은 이런 상황을 조직 발전의 호기로 보기보다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 정치적, 재정적 압박을 던져준 것으로 받아들였다. 5월의 쾰른 노동조합대회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을 의제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당의 분위기는 이와는 좀 달랐다. 흥미롭게도 베른슈타인과 일부 수정주의 지도자들은 총파업 전술에 호의적이었다. 이들은 정치총파업이 자신들이 구상하는 제한된 개혁 목표를 성취하는 데 유효한 전술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직 원내 의석수로 자유주의 정당들을 압도해서 그들에게 사회민주당과의 제휴를 강요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총파업이 유력한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어디까지나 당과 노동조합 지도부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는 총파업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좌파가 생각한 정치총파업의 상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는 동안 고국인 폴란드(당시 러시아령)로 달려가 투쟁의 양상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왔다. 당시 관찰의 결과물인 ?대중파업론?(국역본: 풀무질)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의 사례를 들어, 일단 정치총파업이 벌어지면 더 이상 최고 지도부에 의해 조절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투쟁 국면이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를 ‘대중파업’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중파업의 물결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은 유례없이 확장되고 가장 낙후한 노동자층이 어느새 투쟁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어느 나라에서나 대중파업이 곧바로 혁명적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야 노동자계급은 비로소 혁명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대중들에게 새로운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 이제 당의 역할이어야 한다.

정치파업 전술을 둘러싼 수정주의자들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강조점의 차이는 일상 개혁 투쟁을 둘러싼 오래된 입장 차이와 연관된다. 전자가 여전히 현실적 성과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굳건히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성장을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이 그려낼 수 없었던 혁명적 일상 투쟁의 상을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비로소 찾아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 구상의 현실 검증이 역사 속에 보장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1905년 9월의 예나 당대회는 쾰른 노동조합대회의 다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총파업 투쟁을 당 전술의 하나로 채택했다. 하지만,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긴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조합 측의 불만을 무시할 수 없었던 베벨 등의 당 지도부는 다음해 2월에 노동조합 지도부와 비밀회의를 열어 어떠한 실질적인 총파업 선동도 하지 않겠다고 확약했다. 그리고, 그 해 9월의 만하임 당대회에서는 노동조합의 전술적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노동조합 지도부를 예나 당대회의 결의로부터 면제해주었다.

이 무렵에는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독일 노동자들의 오랜만의 투쟁의 물결도 다시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은 1907년 총선에서 이전의 81석의 절반에 불과한 43석만을 얻는 대패를 경험했다. 1905~1906년의 급진화가 선거상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주장 속에 당은 더욱 확실히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당의 변화


그 해에 있었던 메이데이 기념 행사가 기억에 남아 있다. (중략) 상당수의 독일 사회민주당원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침묵을 지키면서 시내를 빠져 나와, 교외에 있는 기념식장에서 축배를 들기 위해 그곳으로 행진하였다. 그들은 깃발이나 현수막도 들고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 같은 독일의 메이데이는 전세계 노동계급의 승리를 나타내는 시위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레닌과 크루프스카야]는 교외의 주연장으로 향하는 행렬에서 빠져 나와, 늘 그러했듯이 뮌헨의 거리를 거닐었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저며드는 실망의 느낌을 씻어버리기 위해서였다.

- N. 크루프스카야, ?레닌의 회상?, 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75쪽.


1905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 호황을 누리던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제는 호황의 끝에서 새로운 쇠퇴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도 많은 것이 바뀌어갔다. 

사회민주당의 최고기관은 5인으로 구성된 간부회의였는데, 당시 이 간부회의의 핵심은 베벨이었다. 베벨은 좌파의 오래된 상징이었지만, 항상 그의 제1 목표는 무슨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당 조직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 때문에 폴마르, 베른슈타인 등 수정주의자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맞추었지만, 이제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 좌파를 최고의 골칫거리로 여겼다. 베벨의 뒤에는 증기선보조금 파동 당시부터 의연히 당내 우파의 입장을 견지해온 아우어가 있었다. 그는 간부회의 사무실을 자신의 집에 두고 거의 모든 조직 업무를 총괄했다. 1906년에 그가 은퇴한 뒤부터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가 그 자리를 맡았다.

에베르트의 등장은 주목을 요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민주당 창당 이후 당 상근 활동을 통해 성장한 첫 세대였다. 그를 비롯해서 이후 1911년 예나 당대회에서 간부회의 임원으로 선출되는 필립 샤이데만(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수상)과 오토 브라운을 포함하는 이 세대는 모두 순수한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지배한 심성은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도 베벨이나 폴마르는 자신들을 혁명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베르트 등에게 ‘혁명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에게 당 간부가 되거나 노동조합 간부가 된다는 것은 노동자 출신으로서 독일 사회에서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출세의 기회를 잡는다는 의미가 더 컸다.

물론 이들과 같은 세대 안에도 혁명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에베르트와 동갑인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 대표였다. 하지만, 이들은 일부 당 언론 편집장직을 제외하면 중요한 당직을 맡지 못했다. 1차 대전 직전 간부회의는 12인으로 늘어났지만, 이중 좌파는 한 명도 없었다. 좌파가 당 전체의 행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은 당대회 뿐이었지만, 1900년대 말에 들어서면 당대회 결의라는 것은 일상 당지도부의 결정에 비해 별다른 실질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됐다.

당의 주요 활동 영역을 보면, 우선 제국의회 의원단과 지방의회 의원단은 당내 우파의 독무대였다. 지방의회는 당지도부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았고, 그래서 벌써부터 지방의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자유로이 연합하곤 했다. 1890년대의 경제 호황 속에 투쟁보다는 협상을 통해 급속히 성장한 노동조합 역시 우파의 기반이었다. 칼 레기엔으로 대표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우파 성향 당 간부들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당내 좌파의 주요 무대로는 일부 당언론과 청년운동이 있었다. 특히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아들인 칼 리프크네히트(변호사)는 청년운동을 통해 당내 좌파의 새로운 희망으로 부상했다. 한 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1907년 베를린에서 문을 연 당 연수원의 역할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맑스주의 지식인이 강의를 주도하면서 연수원은 좌파 활동가들의 양성소 역할을 했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위기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논증한 선구적 저작이며, ?자본? 이후 맑스주의자의 손으로 쓰여진 최초의 경제학 대저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이 태어난 것도 바로 이 연수원 강의를 통해서였다. 


1914년 8월 4일을 향해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군사 공채에 찬성 투표를 던졌다는 기사가 담긴 <전진>이 스위스에 도착하자, 레닌은 이것은 독일의 참모본부가 적을 속이고 위협하기 위해 찍어낸 가짜 신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판적인 정신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믿음이 아직도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 L. 트로츠키, ?나의 생애 上?, 박광순 옮김, 범우사, 370-1쪽.


물밑에서 잠자고 있던 노선논쟁이 다시 불거진 것은 1910년 수상이 바뀌는 와중에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움직임이 다시 일면서였다. 2월과 3월 중에 시위와 파업이 잇달았고 당내에서도 오랜만에 전투적인 분위기가 나타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선두로 좌파 활동가들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투쟁을 고조시키려 했다.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풀뿌리 노동자들이 좌파의 이야기를 들으려 모여들었다. 좌파는 “민주공화국”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대중파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지도부는 2년 뒤의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행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카우츠키가 지도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대중파업은 저발전된 동유럽 사회에나 적절한 투쟁형태이며, 서유럽에서는 ‘소모전’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참호를 파고 죽치고 앉아 결정적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반세기 뒤에 나타날 그람시 사상에 대한 우경적 해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래의 유럽 공산당 우파 이론가들이 반복하는 것처럼 카우츠키가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소모전 속에서 전력을 소진시키는 것은 적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들이 제 풀에 지치길 기다리는 그 동안 기아와 의욕상실로 죽어 나가는 것은 아군일 수도 있다.

1907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5년간 절치부심하며 준비한 191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최대한 다수 의석을 확보한 뒤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해 원내에 진보파 다수를 형성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사회민주당 역사상 처음으로 부르주아 세력과의 연정을 꾀한 것이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사회민주당은 425만표(27.7%)를 얻어 원내 제1 당이 되었다. 드디어 권력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합한 결선 투표에서 사회민주당 지지 유권자들은 부르주아 정당들에 투표한 반면 부르주아 정당 지지 유권자들은 사회민주당에 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래서 31개 의석을 더 얻을 것이라던 예상이 깨지고 11석만을 추가로 확보, 110석이 되었다. 자유주의 정당들과의 연합은 깨졌다. 제1 당이 되고서도 사회민주당은 다시 주변 세력으로 밀려나야 했다. 다만, 변화가 있었다면, 100명이 넘게 된 국회의원들이 당을 완전히 좌지우지하는 위치로 부상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8월, 베벨이 죽는다. 베벨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레데부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회민주당의 20퍼센트는 급진파고, 30퍼센트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그 나머지가 베벨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그 베벨이 사라진 것이다. 당의 현실 정치와 이상주의를 봉합하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진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에는 제국주의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1911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모로코 위기가 벌어졌고, 1913년에는 제2차 발칸전쟁이 발발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 긴장이 고양됐다. 1912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 위기가 닥치면 각국 노동자들의 동시 총파업 투쟁을 포함한 반전운동에 돌입하자고 결의했다. 정치총파업 전술을 거부해온 독일 사회민주당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처음 반전 대중행동 결의가 제출된 이후 끊임없이 이를 거부해왔으나, 바젤 대회에서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의 명운을 거는 투쟁은 결코 이렇게 열의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의 기류가 바젤 결의의 내용과는 너무도 달랐다는 것은 1913년에 사회민주당 의원단이 국방비 증액안에 손을 들어준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방 예산 증가분을 직접세로 걷는다는 것이 사회민주당 의원들에게는 좋은 알리바이가 되어주었다. 당 강령에 명시되어 있는 “직접세 증가”를 실현시킬 기회라면서 의원들은 전쟁을 꿈꾸는 집권 세력의 길을 닦아주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등 소수 좌파만이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이제 제국주의의 중추인 군부 세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만이 노동자계급을 한 걸음이라도 전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1914년 초부터 좌파는 군대 내의 가혹행위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캠페인에 나섰다. 이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6월 29일 법정에 섰다. 피고에 대한 정부의 투옥 위협에도 불구하고, 군대 내 폭력을 증언하는 수천 명의 피고측 증인이 쇄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대전을 한 달여 앞두고 벌어진 군부와의 이 정면 대결에서 당내 좌파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상 투쟁의 전형을 비로소 찾아낸 듯 싶었다. 비록 제도권 내의 활동에서 출발한다 할지라도 체제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대중 행동의 새로운 장을 연다는 원칙이 드디어 피와 살을 얻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늦었다. 아니, 이들에 비해 역사가 너무 빨랐다.

재판 하루 전인 6월 28일에 벌어진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이 유럽 전체에 전쟁 위기를 낳았다. 예상과는 달리, 혹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대로 전 유럽 노동계급 차원의 반전운동의 열쇠를 쥐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총파업을 소집하지 않았다. 8월 4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쟁 예산을 승인했다. 지치고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를 원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마치 신들린 듯이 전쟁 바람에 휩쓸려 전선으로 달려갔다. 사회민주당은 ‘전쟁’이 아니라 ‘혁명적 대중운동’을 통해 이런 일상으로부터의 폭발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은 결코 이를 시도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이로써 유럽 최초?최대 노동자 정당의 40여년간의 전진은 ‘혁명의 포기’라는 죄보다도 훨씬  무겁고 씻을 수 없는 죄악, 즉 수백만의 민중의 자식들을 진흙탕 속의 구더기 밥으로 만들어놓는 것으로 역사의 한 매듭을 짓고 말았다.


* 이 글을 쓰는 데 다음의 연구성과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강철구,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념투쟁과 개혁주의(1890~1914)?, 서울대학교 서양철학과 박사학위논문.

박호성,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까치.

송충기,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사회주의자: 7월위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이병철, ?독일 사민당의 Burgfrieden 정책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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