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1세는 누구?
오늘의 생각 10 (교황 프란치스코)
경향신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제의 현실참여를 촉구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통제 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이야기하면서 “교회는 사회통합과 인권·시민권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해결책을 찾아내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일반“통제 안 받는 자본주의, 새로운 독재일 뿐” 교황 ‘사제로서의 훈계’ 공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272102301&code=970100
교황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교황의 지난 행적과 무관하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이 되기 전에는 조그마한 숙소에서 자신이 스스로 밥을 해먹고,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 등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아온 사제로 유명하다. 그리고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서 군사독재를 겪었고, 아르헨티나가 경제몰락을 겪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폐해를 직접 경험했던 분이다.
교황 발언이 기사가 된 것은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가톨릭 정의구현 사제단이 중심이 되어 현 정부를 비판하는 미사가 있었고, 대통령과 정부는 미사에서 있었던 발언 일부를 꼬투리 잡아 모든 것을 종북으로 몰아가고 있다. 정부의 이런 태도에 호응하는 가톨릭의 한 주교는 ‘종교의 정치참여를 자제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어떤 것이 정치행위이고 어떤 것이 갈등의 중재인지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에 교회가 현실문제에 얼마만큼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말씀대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늘 되새겨야 한다. 또한 이 성경문구는 다만 개신교나 가톨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에 다 해당되는 말이다.
최근 조선시대 불교위상변화를 공부하면서 종교가 권력과 야합하고, 이재利財를 탐하여 종교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렸을 때 종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 깊게 느끼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불교가 종교로서의 빛을 잃자 불교는 나락으로 추락했고 주자학세력에 밀려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과거 고려 말의 불교, 조선시대 후기의 주자학과 무엇이 다른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기 있는 이유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85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의 종교의 현실참여 문제를 떠나 이 기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문구 때문이다.
교황은 “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현 시대에 맞게 고쳐 말하면 ‘경제적 살인(경제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소외시키는 것)을 하지 말라’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또 “어떻게 주가 지수가 2포인트 하락하는 것은 뉴스가 되는데, 홈리스 노인이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글을 보면서 섬뜩했다. 그래 나 역시 또 다른 살인을 하지 않았을까..... 살인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내 머리를 세차게 치고 지나갔다.
글을 글자 그대로의 뜻만으로 해석하면 발전이 없다. 성경이나 불교경전을 당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지 않으면 경전은 죽은 책이 되고 만다. 그러나 아직도 경전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읽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성경문구 그대로 해석하여 지구의 역사가 만년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고,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는 이곳에도 있다!
기독교의 십계명에서는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직접 살인을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들은 과연 살인하지 않을 것일까. 말 한마디 때문에 사람의 기를 꺾어 자기 재능을 살리지 못하게 하였다면 이 또한 ‘정신적 살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읽은 <살인의 심리학>에서 살인의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살인에 대한 죄책감은 적어진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비행기 조종사는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전장에서 소총병이 자신이 보고 있는 적을 쏘아 죽인 것이나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려 사람을 죽인 것이나 무엇이 다른 것인가.
내가 보고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살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의 것을 과하게 취함으로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심리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에 함몰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이익을 얻는 것이 오히려 찬양의 대상이 되고 보니. 그로 인해 나타는 남의 고통-삶의 터전에서 밀려나든, 추위에 떨든-그것은 개인 무능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무관심해지고, 당연한 것이 된다.
우리 삶이 혼자만으로 지탱할 수 없다. 그것을 확실하게 느낀다면 남을 배려하고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히 많아질 것이다. 세상에 모든 것이 자신만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닌데.... 왜 우리는 점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사라지는지....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빛을 던져주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왤까...
이런 교황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이런 분이 종교계에 지금보다 훨씬 많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더 살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이런 분이 교황이 되셨다는 것에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란 한 가닥 희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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