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위한 경제를 꿈꾸는 대안 경제 운동

2013. 11. 26. 23:19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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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범준 전 한밭레츠 두루지기


2006년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와 그가 설립한 그라민 은행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담보나 보증이 없어 전통적인 금융기관과 거래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소액의 창업자금을 무담보•무보증으로 대출하고 창업과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무담보 소액융자 활동(마이크로크레딧, microcredit)을 벌여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마이크로크레딧은 굳이 분류하자면 일종의 대금(貸金)활동이다. 대금이라는 용어 앞에는 의례히 고리(高利)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닌 모양이다.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였던 유누스 박사가 단돈 20달러를 빌려 쓰기 위해 고리대금의 희생양이 되곤 하던 방글라데시의 민중들에게 소액융자라는 이름으로 대금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73년이었다고 한다. 이후 소액융자 활동을 위해 그가 설립한 그라민 은행은 창립 20년 만인 지난 1993년부터 흑자 행진을 하고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와 그라민 은행의 업적은 단지 빈곤퇴치에 기여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물건을 사고 팔거나 돈을 빌려주고 갚는 경제활동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자본을 집중시키데 복무해 왔다. 돈이라는 인류의 발명품은 더 이상 교환의 편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인간의 숭배를 받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목줄을 조이는 거대한 통치자가 되어 버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고 가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돈이기에 친구나 가족 사이에는 돈 거래를 하지 말라고 말하곤 하지 않는가?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에서 그들은 돈을 빌려주고 갚는 하나의 경제활동이 민중을 수탈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돈 그리고 경제활동이라는 것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향기가 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그런 시도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고민에서 대안 경제 운동 또는 공동체 경제 운동은 싹이 트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화폐 이야기

국내에도 이미 무담보 소액융자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신나는 조합’과 `사회연대은행’ 등 일부 비정부기구(NGO)가 자활 의지 및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무담보•무보증의 창업자금을 대출하고 창업과 관련된 컨설팅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대출은 물론 신용카드, 대부업체와 불법사채업자까지 이미 돈을 빌려주는 것이 이윤을 만드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자리잡은 우리 나라의 현실이고 작년에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되면서 사회적인 관심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무담보 소액융자 활동은 국내에서 크게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국내에서 대안경제 운동은 주로 우리나라의 공동체적인 전통과 자본주의적인 생산, 분배 방식이 결합된 생산자협동조합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 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무담보 소액융자 활동과 협동조합 운동 등이 기존의 화폐경제 질서 속에서 공동체성을 추구한다면 공동체 화폐 운동(지역화폐운동 또는 지역화폐운동이라고도 불림)은 기존의 화폐가 아닌 자신들의 화폐로 거래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을 갖는다. 아직까지 생소하게만 느껴지긴 하지만 공동체 화폐 운동은 세계적으로 볼 때 제법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공동체 화폐의 기원은 1830년대 노동증권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레츠(지역화폐 LETS: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라는 용어는 1983년 캐나다 서부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였다. 당시 코트내이(Courtenay)시는 공군기지의 이전과 목재산업의 침채로 실업률이 치솟고 있었고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마이클 린튼 역시 실업자가 되었다. 린튼은 중앙은행이 제작하여 대규모로 유통되고 늘 부족하여 사람들을 경쟁하고 다투게 만드는 현실화폐(real money 또는 BAD money)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는 것을 포기하였다. 대신에 그는 아내 셔릴과 함께 현실화폐가 없이도 자신이 가진 재화나 능력을 서로 제공하고 제공받음으로써 삶을 이어가는 실업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공동체 내부에서 사용할 화폐(지역화폐, local money 또는 GOOD money)와 그 화폐를 운영할 수 있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고안하여 처음 지방고용교역시스템(Local Employment and Trade System)이라 이름을 붙였다. '코트내이 레츠'는 1983년에 시작되었는데 2년 후 회원은 500명에 이르렀으며 회원들간의 거래량은 달러로 환산하여 30만 달러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이 시스템은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레츠의 이념은 캐나다 전역에 퍼져나갔다. 거래의 방식과 통화 관리 방식 등에 따라 수 많은 종류로 나눠볼 수 있겠지만 현재 캐나다는 물론 호주, 뉴질랜드, 일본,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많은 나라에서 수천 개의 공동체가 사용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지역화폐는 바로 이 레츠(LETS)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체 화폐는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화폐이다. 생산과 소비의 단위가 끊임없이 커지고 세계화라는 이름의 시장통합이 이뤄지고 있는 커다란 흐름에 정확하게 반대의 길을 공동체 화폐는 제시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의 강수돌 교수는 자신의 기고에서 공동체 화폐의 특징을 실명성, 탈이윤, 자립성, 연대성, 평화성, 생태성이라는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런 특징은 현 시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돈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이다.


실명성, 탈이윤, 자립성 ,연대성, 평화성, 생태성

일반 화폐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익명성이다. 누군가가 쓰고 있는 그 돈이 노동자의 피와 땀을 빼앗은 거나 로또에 맞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번 돈인지 흉악한 범죄로 벌어들인 돈이지 힘겨운 삶 속에서도 꼬깃꼬깃 모아온 돈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공동체 화폐를 통한 거래에서는 상대방과의 일차적인 접촉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공동체 성원 간의 인간적 관계가 항상 중요하다. 일반 화폐로 거래할 때와 달리 공동체 화폐 거래에서는 돈이 돈을 낳는 이윤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기에 부채에 대한 이자라는 개념이 없다. 공동체 속에서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자가 되기도 하고 소비자가 되기도 하는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거래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를 키우기 위한 행위이다. 일반 화폐를 구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독점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지역 화폐 공동체 안에서는 각각의 성원이 잠재적인 소비자 또는 생산자로서 자립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공동체 화폐를 통한 거래를 통해 성원들은 서로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공동체적인 관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런 연대의 과정에서 이익의 충돌에서 오는 갈등은 최소화되고 거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살아남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운 대화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역 내에 존재하지만 일반 화폐로 거래하지 못했던 다양한 형태의 재화들이, 예를 들면 쓰지 않던 아기 용품이나, 가게를 열지 못한 싱크대 기술자의 노동이 공동체 화폐를 통해 거래되면서 지역 내의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역 화폐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국내의 공동체 화폐 운동은 이러한 공동체 화폐의 긍정적인 특성을 어떻게 그리고 얼만큼 현실화하고 있을까?


공동체 화폐로 거래하기

글 제목 : 총회 때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쓴이 : 회원 나)
회원 가, 그 날 어디서 내리는지도 모르는 715버스를 타고 갔든, 택시를 타고 갔든, 혼자서 갔으면 헤매느라 고생을 했을 겁니다.
마침 태워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고마워서 3,000 두루 드립니다.

1999년 한밭레츠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대전지역 지역 화폐 공동체 홈페이지(http://www.tjlets.or.kr)에 최근 올라온 거래 기록이다. 모임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지난 2006년 한 해 동안 600명이 조금 안 되는 한밭레츠 회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식의 거래가 5,520건 일어났으며 그런 거래를 통해 36,371,350원의 현금과 56,637,340 두루의 공동체 화폐가 회원들 사이를 오고 갔다. 여기서 두루란 지역 공동체의 성원들이 거래에 사용하는 자체적인 화폐 단위이다. 두루두루 쓰인다는 순 우리말에서 따온 두루라는 화폐 단위를 서로간의 거래에 이용하는 것이 한밭레츠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다.

글 제목 : 메주콩 (글쓴이 : 회원 다)

두루준이 회원 다 유기농 메주콩 한말 50000원 5000두루
두루번이 회원 라
잘 먹을께요.

또 다른 거래 기록을 보면 이렇게 실제 화폐와 공동체 화폐를 함께 사용할 수도 있다. 대체로 일정 비율 이상의 두루를 거래에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거래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해 그 비율을 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회원들 사이에 거래가 일어나면 위와 같이 홈페이지의 게시판을 통해 또는 전화 연락 등을 통해 거래 사실을 등록소에 알려야 한다. 모임에서는 등록소에서 모임의 실무를 맡고 있는 실무자를 두루의 거래를 맡아본다는 의미로 두루지기라고 부르는데 두루지기는 이런 거래 기록의 취합하여 각 회원의 계정을 관리한다. 위의 메주콩 거래를 예로 들어보자. 회원 가가 회원 나에게 유기농 메주콩 한말을 받고 50,000원의 실제 화폐와 5000두루를 지불하기로 했다. 이중 상품인 콩과 실제 화폐를 직접 주고 받은 후 등록소에 거래를 신고하면 두루지기는 해당 거래를 기록하고 회원 가의 두루 계정에 -5,000두루를 회원 나의 두루계정에 +5,000두루를 기록한다. 0에서 시작한 각 회원들의 두루 계정은 이런 거래를 통해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다양한 온라인 공간에서 통용되는 사이버머니와도 같은 이런 거래가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일까?


사람을 중심에 놓은 거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래라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따뜻한 행위일 수도 있다. 어린 시절 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나 떡볶이집 아주머니와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모든 거래에는 인간적인 관계라는 따듯한 면이 분명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요즘에는 거래라는 행위에서 좀 더 싸게 사고, 좀 더 비싸게 파는 이윤이 중심이 되어버리면서 그런 따뜻한 관계라는 측면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뿐이 아닐까? 그러나 위에 등장한 한밭레츠 회원들 사이의 거래 기록에는, 그리고 그 행간에는 도움을 주고 받은 사람들 사이에 고마운 마음이 담겨있다. 자본주의적인 거래에 익숙해지면서 가려져있던 거래의 일면이 다시 부각되는 것이다. 물론 택시를 타고 3,000원의 현금을 지불하는 일반적인 거래에서도 우리는 제공받은 노동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많은 경우 ‘내 돈 내고 일을 시키는’ 마음 가짐이 되는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를 일반 화폐 거래의 보편적인 형편이다. 이런 거래와 달리 조금 수고스럽지만 행사장까지 가는 길에 교통편을 제공해준 다른 회원에게 전하는 고마운 마음의 표시가 바로 3,000두루 거래의 기록이며 이것이 공동체 화폐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농산물 거래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관계가 거래의 중심에 놓인다. 시골 장터에 난장을 벌인 할머니에게도 몇 백 원을 깎으려 드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지만, 한번이라도 그분들과 함께 나물을 하러 산을 올라본다면 그렇게 매몰차게 값을 흥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된 농사일에 잠시라도 참여해 본다면 농약과 제초제를 뿌린 농작물보다 몇 배의 손이 가는 유기농산물에 기꺼이 비싼 돈을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격이나 품질 등 다른 거래 요소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로 대전 인근의 농사꾼인 회원의 농산물을 구입할 때 이런 거래에는 돈과 상품 이상의 무언가가 오고 간다. 올해 농사는 어땠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이야기가 오고 가기 마련이다 보니 상품 자체뿐 아니라 거래를 통해 만나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중요한 관심을 두는 것이다. 정부에서 붙여준 유기농 인증 스티커보다 더 믿음직한 것은 바로 그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인 것이다.
실제로 한밭레츠 공동체 안 에서는 농사를 짓는 회원들이 일손이 급할 때 도시에 사는 회원들에게 품앗이를 요청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다. 이 경우의 도농 품앗이는 그 동안 농산물을 판매하면서 쌓아온 두루를 품삯으로 주는 거래일 뿐 아니라 푸짐한 참과 농주를 나누며 함께 땀 흘리며 즐기는 공동체 놀이이기도 하다. 처음 거래에 참여할 때, 가격을 정하고 두루 비율을 정하는 것에 어색해 하고 두루라는 가상의 비공식 화폐를 주고 받는 것에 낯설어 하던 회원들도 한 두 번 거래에 참여하면서 인간 관계를 키워가는 거래의 맛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공동체 화폐로만 거래할 수 있는 것

글 제목 : 중3 문제집 거래했습니다.  (글쓴이 : 회원 바)
회원 마님, 아주 깨끗한 문제집 잘 받았습니다.
무진장 감사하구요,,
1000두루 입니다.

글 제목 : 우편물 발송 작업  (글쓴이 : 의료생협)

우편물 발송 작업 인건비를 드립니다.
두루준이 : 의료생협
받 은  이 : 회원 사
금      액 : 24,000두루

공동체 화폐를 통한 거래는 일반적인 화폐 거래와 달리 거래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중심에 둔다는 차별성을 갖기도 하지만 일반 화폐로는 도저히 거래할 수 없는 것을 거래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형제자매의 수가 줄어들면서 의례 버려지곤 하는 아이의 헌 문제집이 새 주인을 찾아가기도 하고, 간단한 우편 발송 작업을 도와준 대가로 일당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병원 일을 돕고 받은 돈으로 ‘회원 사’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는다. 일반 화폐로 거래를 할 때는 그것이 상품이든 노동력이든 시장에서의 상품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처음 지역화폐 운동을 시작한 캐나다의 실업자들과 같은 경우처럼 어떤 상황 때문에 시장에서의 상품성을 가지지 못한 노동력도 있기 마련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적지 않은 청년 실업자는 물론 재취업을 원하는 주부들이 있으며, 건강과 능력 그리고 풍부한 경험을 갖고도 하던 일을 그만둔 노년층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작년에 쓰던 문제집이 쓸모 없는 것이 아니고, 색이 바랜 사과를 먹을 수 없는 것이 아니듯, 이들은 노동력이 시장에서 상품성을 갖지 않는다고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화폐 거래는 이렇듯 일반 화폐로 쉽게 거래될 수 없는 상품과 노동력의 거래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돈을 받고 하기엔 참 어색한 일일 지라도 공동체 화폐 거래를 통해서는 그 누구든 공동체 안의 누군가에게 기여하여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할 능력과 의사를 가지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다.

이렇게 공동체 화폐 시스템은 회원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두루를 벌고 쓰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 지역 화폐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마이너스 두루 계정을 갖는 것을 무척 힘들어 하기 마련이다. 이론적으로 회원들의 두루 계정은 항상 총합이 0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 두루 계정을 가진 사람도 있고 – 두루 계정을 가진 사람도 있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데도 말이다. 아마도 일반 화폐로 치면 빚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레츠 시스템에서 마이너스 계정을 가진 사람은 공동체에서 도움을 많이 받은 셈이니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되고, 플러스 계정을 가진 사람이면 공동체게 기여한 것이 더 많은 셈이니 자부심을 가지면 될 뿐이다. 마이너스 계정에 대한 질타나 그 어떤 이자 또는 의무의 증가도 없으며 플러스 계정에 대한 그 어떤 인센티브나 재산의 증가도 없는 것이 레츠의 시스템의 특징이다. 재산의 증감이 권력과 직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의로 도움만 받고 기여를 하지 않아 마이너스 계정이 끝없이 늘어나는 회원이 있다면, 그런 도덕적 해이에 대한 어떤 처벌 규정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윤을 중심으로 거래하는 익명의 다수가 아니라 관계를 중심으로 거래하는 소수 공동체의 활동에서는 굳이 그런 처벌 규정이 필요하지 않다. 가족 공동체 구성원 중에 혜택만 받고 기여를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그 어떤 공식적인 규제가 정해져 있는가? 공동체는 그 안에서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 사람 자체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며 그런 공동체의 판단이 그 어떤 공식적인 규제보다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그 동안 국내 지역 화폐 운동의 길지 않은 역사에서 그런 도덕적 해이 때문에 좌절된 공동체는 아직까지 없었다.


화폐 시스템 또는 공동체 시스템

당연한 말이지만 공동체 화폐 시스템이 지속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유지되어야 한다. 등록소를 지키는 두루지기의 역할이 단지 두루 계정을 관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루지기는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통해 회원들 사이의 신뢰와 유대감을 만들어 내는 일을 맡는다. 물론 두루를 사용한 거래가 관계의 중심이다. 등록소는 회원들의 거래 기록을 관리하고 회원들의 거래가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등록소라는 현실 공간가 회원들에게 배포하는 소식지 그리고 인터넷 상의 홈페이지는 이런 정보가 오고 가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을 통해 회원들은 내가 제공할 것들, 내가 필요한 것들을 알리고 거래할 상대방을 찾는다. 더불어 등록소의 두루지기는 공동체가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한다. 공동체 화폐 시스템은 화폐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시스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품앗이 만찬은 레츠 공동체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밭레츠의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행사이다. 행사 날이면 회원들은 각자 가지고 갈 음식을 준비한다. 어떤 집은 잡채를 해오고 어떤 집은 김밥을 싸오고 어떤 집은 음료수를 가지고 오는 식이다. 특별히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회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몇몇 회원이 먼저 모여 커다란 솥에 감자를 삶거나 국수를 끓이는 일도 있다. 회원들이 모이면 음식을 나눠먹으며 품앗이 만찬이 시작된다. 신입회원들이 인사도 하고 가족 별로 장기자랑도 하고 노래도 배우고 공동체 놀이도 즐기며 어느새 만찬은 잔치판이 된다. 한쪽에서는 각자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을 가지고 나와 두루 장터가 벌어진다. 또 한쪽에는 두루를 받고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거나 놀 거리를 제공하는 회원들 앞에 아이들이 모여 있다. 서예를 써주는 회원, 농사지은 농산물을 들고 나온 회원, 집에서 뭔가를 만들어 나온 회원……. 그날 하루는 거래인지 시장인지 나눔인지 놀이인지 모를 뒤죽박죽 흥겨움이 가득하다. 이렇게 2개월마다 한번 열리는 품앗이 만찬 외에도 품앗이 학교를 통해 공예나 악기를 배우기도 하고 철마다 함께 봄나물을 뜯거나 김장을 담기도 한다. 대전 근교에서 농사를 짓는 회원 집에 몰려가 품앗이를 하기도 하고 함께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2004년부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으로 근교의 문화소외지역이나 단체를 찾아 영화를 상영하는 ‘이동영화관’을 회원들의 봉사활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물론 봉사에 참여한 회원들에겐 등록소에서 두루를 제공한다.


공동페 화폐는 지속 가능한가?

공동체가 살아있는 한 공동체 화폐는 존재할 수 있다. 등록소를 지키는 두루지기는 공동체에게서 노동의 비용을 받는다. 이론적으로는 공동체 화폐로만 임금을 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두루지기도 실제 화폐가 필요하다. 이론적으로는 회원들의 회비와 공동체 내 거래에 부과되는 수수료가 등록소의 수입이지만 아직 그런 수입만으로 등록소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초기부터 레츠 공동체의 이상을 위해 매달 후원금을 내는 몇몇 회원이 있었고 보수를 받지 않고 등록소 실무자 자원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신념에 찬 소수의 희생에 의존하는 것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한밭레츠 역시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두루지기에게 최소한의 실제 화폐를 지급하고, 회원들의 파트타임 자원봉사를 늘리는 등의 변화를 꾀하였다. 두루지기는 공동체 내의 모든 노동과 상품을 100% 두루로 구입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있고, 인터넷을 통해 거래를 기록하고 처리하는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개발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모색이 여전히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밭레츠는 이제 6년의 세월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해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많은 의문부호들이 한밭레츠의 안팎에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은 국가가 아닌 기관이 화폐를 발행하고 운영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또는 공동체 화폐 거래에 대해 세금은 어떻게 부과해야 하는 지 따위의 제도적인 문제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공동체의 규모인데 레츠가 태동한 캐나다 등 서양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레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한밭레츠는 인구 2백만이 가까운 대도시와 그 주변 배후 농촌을 아우르고 있다. 현재 등록소가 있는 대덕구 법동, 중리동 지역은 공단과 작은 평형의 임대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으로 주변에 독거노인 등 저소득 계층이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공동체를 주도하는 회원들은 대전 전 지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시민들이다. 본래의 취지에 맞는 운영을 위해 한밭레츠 내에 동네 모임을 활성화하고 등록소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법동레츠를 추진하는 등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공동체 화폐 운동이라는 실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동체 화폐 운동은 대안 경제 운동이다. 대안 경제 운동이면서 공동체 운동이다. 과연 공동체 화폐 운동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전통적인 사회에 존재하던 품앗이, 두레 등 공동체적인 관습에 서양의 시스템을 붙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무언가 일까? 계급사회로 발전하기 이전에 원시부족 내에 나타난 빅맨이나 봉건사회 말 상인들의 탄생과 같이 다음 체제로 이행하기 전에 나타나는 다음 체제의 맹아일까? 현 체제의 핵심인 경쟁과 무한의 이윤추구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저항일까? 사회 안전망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런 대안적인 움직임이 한편으로 이 사회의 진보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땅에 살아가는 민중의 삶에 그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공동체 화폐에 대한 궁극적인 궁금함이라면 그 답은 바로 사람에 있을 것이다. 지역 화폐 공동체에 참여하여 생태적인 삶의 방식을 접하고, 공동체의 기쁨을 누린 사람들이 있다. 가진 것이 없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조금 더 가진 것을 조금 덜 가진 이웃들과 가누는 즐거움을 체험한 사람들이 있다. 좀 더 큰 규모로 경제를 통합하고, 좀 더 효율적으로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삶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세계화된 경제 체제에서 한국 농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시대에 ‘내 이웃이 땀’ 그리고 ‘그와 내가 맺고 있는 관계’가 거래에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실험은 과연 누군가의 비아냥처럼 배부른 중산층의 유희에 불과할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겪지 않은 미래를 앞서 경험하며 시행착오를 겪음으로써 우리 사회의 진보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돈이 지배하는 시대에 자신들만의 돈을 창조하여 돈의 지배에 저항하는 실험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그들의 실험이 돈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시대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공동체 화폐로 치료를 받는 사람들 >>

한밭레츠의 성공적인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또 다른 대안경제 운동인 의료생활협동조합 운동과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공동체 화폐가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를 통해 생활필수품을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 화폐로 집세를 내고, 쌀을 사고, 옷을 살 수 있다면 즉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 힘을 대단할 것이다. 1999년 대전 의제21 추진위원회 안에서 나눔과 보살핌의 공동체를 목표로 만들어진 한밭레츠 역시 같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식주는 아니지만 삶에 꼭 필요한, 그리고 제법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의료서비스를 공동체 화폐를 지불하여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당시에 한국에 도입되어 있던 의료생협 운동을 주목하게 되었다. 주민이 주인 되는 병원. 환자의 권리가 중심이 되는 병원. 공동체 화폐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 함께 건강을 지켜가는 공동체를 목표로 2002년 4월 대전 민들레 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탄생하고 의료생협이 운영하는 민들레 의원과 민들레 한의원이 대덕구 법동에 개업하면서 공동체 화폐는 그 생명력을 높이게 된다.


침 맞는데 3,000두루

대전시 대덕구 법동. 높게 자란 가로수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민들레 의원과 민들레 한의원, 그리고 민들레 치과의 간판이 보인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자 중에 허리가 굽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안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고단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많은 노인 환자들은 침도 맞고 뜨끈하게 찜질을 받을 수 있는 한의원을 선호한다. 당뇨 등의 지병이 있는 노인들은 정기적인 문진을 통해 관리를 받기도 한다. 간단히 맥을 짚고 침을 맞는데 드는 비용은 3,0000두루. 돈 몇 천원이 아까워 병원에 가길 꺼리는 어르신들이지만 민들레 병원에는 출근하듯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다. 지난 해 개업한 치과 역시 마찬가지다. 보통 치과에 한번 가면 목돈이 든다는 생각에 웬만한 고통을 참고 지내는 어르신이 많지만 민들레 치과에서는 다르다. 수입에 큰 도움이 되는 임플란트나 미용 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일반 치과와는 달리 시간 당 수입 단가가 턱없이 낮은 보험치료를 주로 한다. 이빨 치료에 큰 돈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 있는 환자들도 큰 부담 없이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공동체 화폐를 지불하고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로 당연히 한밭레츠의 회원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민들레의료생협에 출자를 해야 한다. 조합원 즉 병원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출자금은 최소 십 만원이며 그 금액 역시 여러 달에 걸쳐 나누어 낼 수 있다. 2006년 기준으로 천 세대가 조금 안 되는 지역 주민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단지 의료서비스의 소비자 또는 수혜자가 아니라 소식지를 만들거나, 의료 및 관련 교육 프로그램에 자원봉사를 하고 나아가서는 조합의 감사를 맡거나 인사에 참여하는 등 실질적인 운연에 참여하기도 한다.


건강한 공동체 만들기

의원과 한의원, 치과의원을 운영하는 것은 건강한 마을, 건강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의료생협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지 활동의 전부는 아니다. 의료생협은 초기부터 주민을 위한 무료검진과 다양한 건강 강좌를 진행하여 치료 이전에 조합원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려 애썼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조합원들의 환우 모임을 조직하고, 해마다 금연운동, 걷기 운동 등을 벌이기도 했다. 병원에 방문하기조차 쉽지 않은 독거노인을 방문해 보살피고 건강을 챙기는 재가캐어 활동도 벌이고 있다. 병원 운영을 통해 해마다 많은 금액의 두루를 쌓아나가면서 한밭레츠 등록소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아니 건강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의료생협의 목표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끈끈하고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포함한다면 한밭레츠 역시 민들레 의료생협의 든든한 후원자이다. 의료생협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두루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한밭레츠가 생명력을 더 높일 수 있었던 것처럼, 두루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단단하게 성장하면서 민들레 의료생협은 단지 병원을 운영하는 단체가 아니라 함께 건강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밭레츠와 민들레 의료생협의 공동체는 많은 부분이 겹쳐진다. 그렇게 겹쳐지는 공간에는 대안 교육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생태적인 삶 또는 정신적인 고양의 추구, 저항적인 문화와 진보적인 정치 의식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들이 꿈틀거리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다양함 때문에 심심치 않게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지만 그런 갈등 역시 공동체의 건강을 훼손하지는 않고 있다.


시행 착오 속에 발전 중인 대안 경제 운동

기존의 것을 지켜가는 보수의 길에 비하여 새로운 답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대안과 진보의 길은 험난한 것이 사실이다. 대안 경제 운동으로서의 의료생협 운동과 공동체 화폐 운동 역시 외국의 모델이 참고가 되긴 했으나 그저 쉽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초기부터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고 헌신한 선도자들이 있었고 몇 번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일례로 의료생협에서는 작년까지 자체적으로 양,한방 협진을 진행하였으나 그에 따른 치료과정이 현행 제도에 의료보험 부당 청구에 해당하여 벌금이 부과되고 3개월간 의원의 영업이 정지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한밭레츠 역시 무보수로 일을 하던 등록소 실무자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면서 등록서 업무가 마비될 위기를 겪은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마다 어느 뛰어난 개인이나 앞선 외국의 사례가 아니라 공동체의 관심과 애정이 해결책을 제시하며 어려움을 극복해왔다. ‘공동체는 답을 알고 있다.’는 그들의 외침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외침이 아니다. 무보증 소액 융자 운동이든, 공동체 화폐 운동이든, 의료생활협동조합 운동이든 우리가 대안경제 운동이라고 부르는 운동은 결국 본질적으로 공동체 운동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 운동은 자본의 시대가 우리를 내모는 방향과 가장 반대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다양한 모색과 시행착오 속에 대안 경제 운동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인터뷰 ‘임종한 의료생협연대대표’ >>>

국내에서 가장 확고하게 자리 잡은 대안 경제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의료생협 운동은 1994년 경기도 안성에서 시작되었다. 환경보건이라는 주제를 이슈화하고 정책으로 만들어 내는데 앞장서온 인하대학교 산업의학과 임종한 교수(45)는 89년 인천에서 평화의원을 열어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중심으로 한 민중병원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96년 평화의료생협을 설립하였으며 현재 한국의료생활협동조합연대의 상임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민중의료 운동으로 시작하여 의료생협운동, 환경보건운동으로 활동을 넓혀 오셨는데요. 그런 변화의 과정에 대한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89년 기독청년의료인회 회원들이 인천평화의원을 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40여 명 전부가 전공의 월급 두세 달치를 털어 5,000만원의 기금을 만들었습니다. 요즘 돈으로 2억 원 정도 될 겁니다. 매달 소득의 10%를 회비로 모아서 기부하는 결의였고 제가 원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인천평화의원을 저희는 ‘민중의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군사독재 시절 의대생과 의료인들 사이에도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 속으로 들어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구로지역 노동자와 함께 한 구로의원, 농민과 함께 한 안성농민의원과 같은 흐름이었습니다. 비록 이 모두가 하나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민중의원’이라는 교감이 있었습니다.
96년 평화의원을 모태로 삼아 인천평화의료생협을 설립했습니다. 그 과정이 자연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7년여의 평화의원 활동으로 저희는 지쳐 있었습니다. 평화의원 일은 무척 고됐습니다. 의료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때, 투쟁하는 노동자, 빈민이 무료 진료를 요청할 수 있는 병원은 저희뿐이었거든요. 퇴근 이후에는 투쟁 현장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매너리즘에도 빠졌습니다. ‘의원을 매개로 한 지역운동으로 무엇을 더 바꿀 수 있을까?’ 사실 평화의원 폐업까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제 눈을 뜨게 한 것이 일본의 의료생협입니다. 일본의 의료생협은 1960년대 이후 거의 삼사십 년의 경험이 쌓여 있었습니다. 지역사회 주민이 의료시혜를 받는 대상이 아니라,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주체로 나서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의료는 의식주나 교육 문제에 버금간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민중의 생존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시기 우리 나라의 의료제도가 가진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건강한 삶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는 한결같이 높지만, 실제로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병원은 이용하기 불편한 곳입니다. 첨단 의학기술의 발전이 요란하게 선전되는 시대에서 제왕절개 분만률이 세계 최고수준인 35%에 이르고, CT, MRI 등 고가 의료장비 보급률, 약품 사용량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실제로 서민들은 결핵과 간염과 같은 쉽게 예방될 수 있는 질병의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게 되는 일차의료는 낙후되어 지역주민들이 사소한 질병을 가지고도 종합병원을 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양한방의 이원화, 의료기관간의 미흡한 기능 분담 등으로 의료비의 낭비 요인이 상존하고 있고, 시민들은 의료비의 이중 분담을 지고 있습니다
   사회 환경의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시민들의 건강과 의료복지에 대한 요구는 높아지고 있지만, 일차의료기관의 의료의 질은 아직 낮습니다. 한국의 보건 의료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은 여러 형태로 감지되고 있는데, 이러한 고비용 저효율의 의료 구조, 의료의 왜곡의 심각한 문제가 문제로서 아직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사회로 급속하게 변화되면서 의료복지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의료 보험의 재정 고갈이 현실화될 수 있으며, 이는 저소득층의 의료서비스의 접근성을 막아, 부유층과 저소득계층 사이의 건강불평등이 크게 확대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렇듯 산적한 문제들을 개인의 선행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국가나 공공의료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지역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민자치의 접근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료생협이라는 형식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구분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획일화 세계화로 치닫는 거대한 흐름에 반대하는 흐름을 민중운동이라는 부분과 대안운동이라는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두 가지 흐름을 모두 경험하신 셈인데요. 이런 두 가지 흐름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 지요?

세계가 단일시장으로 통합되어가는 세계화는 기업에게는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지만,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큰 시장 지배력을 지닌 대기업에게는 시장의 장벽을 허물고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게 하지만, 소상인, 농민 등 경제적인 약자는 경제 개방의 여파로 그 나마의 경쟁력도 잃게 됨으로써, 세계화는 지역사회 경제의 붕괴와 공동화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은 왜곡된 시장 개방과 세계화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 모순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됩니다.
  하지만, 저항운동만으로 세계화로 이어지는 국내외 사회변화에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할 순 없다고 봅니다.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폐쇄경제를 구축하지 않는 하지 않는 한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것을 막을 순 없습니다. 결국 시장 속에서 의료나 복지의 대안체계를 만들어가지 않을 수 없으며, 지역공동체의 발전과 그들 사이의 협력을 통해 외부 경제의 의존을 최소화하고 공동체의 경제, 문화, 의료, 복지의 활력을 잃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러한 대안공동체운동 역시 불평등한 시장 구조와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을 개선하지 않은 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지만, 시민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의 민주적인 개혁방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환경, 의료, 공동체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사회는 또 다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변화에서 사회 전반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을 2가지 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IMF이후 정부가 시장 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우리사회의 중산층이 붕괴되고, 부유층과 저소득층으로 양분되는 사회 양극화 현상입니다. 교육분야를 예를 들면 이러한 사회변화를 직감할 수 있습니다. 이전처럼 가난한 집의 자식이어도 본인이 노력하면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여전히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해, 사회의 계층간의 이동이 적어지는 경직된 사회 구조가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의료 복지분야에서도 서민들이 받는 서비스의 질은 더욱 낮아 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양극화 현상은 우리사회의 발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기에, 시민들이 참여하는 의료복지, 교육개혁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서의 민주적인 개혁이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의 위기는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야기되는 환경오염으로 자본주의사회의 근간이 위협을 받아 발생하게 됩니다. 최근의 급격한 기후변화, 지구 온난화, 환경성질환의 증가는 우리사회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국가의 하나인 한국에서 에너지 사용증가율이 가장 빠르며, 지구온난화를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이미 세계 10위권입니다. 재생 가능한 새로운 에너지, 녹색교통체계, 친환경적인 생산체계, 친환경적인 소비양식을 새로이 구축하지 않는 한 기존의 생산 소비체계는 우리사회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현 시스템하에서는 우리 자녀와 미래세대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사회가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새로운 녹색변화를 거쳐야 합니다. 사회양극화를 해소할 협동의 새로운 사회 개혁, 친환경사회로의 녹색 개혁, 이 두 가지가 향후 한국사회에의 큰 화두가 될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사회가 민주주의의 제도의 틀을 이제 갖추고 있지만, 그러한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생활 전반이 민주주의적인 원칙과 가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역사회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진작시키는 일이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실질적인 방안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지역사회에서 생협, 지역화폐와 같은 공동체운동은 우리사회의 성숙과 새로운 도약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워낙 경제가 안 좋아, 서민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려면, 시민들이 우리사회의 향후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젼과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인천, 안성, 대전, 전주 등 9개 지역에서 의료생협이 활동하고 있으며 청주와 용인에서 의료생협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연대 조직인 한국의료생협연대(http://medcoop.or.kr/)에서는 의료생협 운동에 대한 소개와 설립에 대한 안내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