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정치운동 (1)
박 성 인/연구위원, 노동자의 힘(준비모임) 대표
들어가며
지금까지 노동자정치운동의 개념부터 세계 각국의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한바퀴 돌고, 이제 한국으로 왔습니다. 지난 5강까지의 내용이 오늘 집약적으로 정리되어야 하는데 미흡한 점이 있다면 오늘과 다음 번 토론을 통해서 논의하도록 합시다.
노동자정치, 노동자민중정치, 진보정치 등 여러 이름으로 얘기되고 있지만, 최근 들어 노동자계급정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집중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계급정치'가 문제로 되는 것에는 몇 가지 정세적 근거가 있습니다. 즉 계급정치가 이론적 수준의 문제를 넘어 현실의 문제, 실천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몇 가지 정세적 요인이 있습니다.
먼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공세가 전면화되면서 그에 대한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이 세계적으로 고양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민중들의 투쟁 그 자체가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국가의 몰락으로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은 없다며 '역사의 종말' 운운했지만, 현실은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자기 한계와 모순이 폭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은 이러한 모순의 표현입니다. 둘째는 역사적으로 노동자정치세력화에서 대안세력이라 하던 사민주의―노동당이건 사민당이건―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이미 정치적 대안의 지위를 잃어버렸고, 스탈린주의적 공산당도 대중투쟁의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민중투쟁과 결합하면서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비제도적 좌파, 혹은 변혁적 좌파운동이 활성화되고는 있으나 아직 노동자민중투쟁의 정치적 대안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자본주의체제 역시 세계자본주의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자본주의가 갖는 보편적인 모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최근 수년간 한국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은 노동자민중들이 그 점을 자각하고 있건 자각하지 못하고 있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과 그 궤를 같이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민중투쟁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정치의 세계사적 보편성이 현실화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특수한 경제적․정치적․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특수한 조건들을 명료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4가지입니다.
첫째는 한국 자본주의가 세계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대한 인식입니다. 최근 IMF 경제위기를 통해서 한국의 자본주의가 세계자본주의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 대중적으로도 자각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남북분단이 가져다주는 문제와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적 대립이 잔존하는 조건에서 계급정치를 모색해야 하는 특수한 과제들이 주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셋째는 1953년 이후 노동자 정치운동이 역사적으로 단절된 조건 속에서 새롭게 노동자정치를 고민하는 것이 특수한 지형이라고 봅니다. 1980년 이후에 새롭게 노동자 계급정치운동이 복원되긴 했지만, 그 역사가 짧고, 그나마 엄혹한 탄압으로 계급정치역량을 축적하지 못한 채 단절되어 왔으며, 그 결과 안정적인 정치적 지도력과 조직력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점이 거꾸로 한국 사회에서 계급정치운동이 더욱 역동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넷째,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과 그에 조응하는 노동자대중투쟁의 급격한 발전에 기초하여 계급정치운동이 모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투쟁은 최근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전투적이고 완강하게 전개되어 왔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이 내셔널센터의 수준에서 총파업투쟁을 전개하는 사례가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대중투쟁동력은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 사회의 특수한 지형 속에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사회, 계급정치의 전망을 노동자민중들에게 어떻게 제출할 것인가? 그것이 단지 바램이 아니라 현실 가능하다는 것을 어떻게 실천적으로 입증해갈 것인가가 지금의 계급정세에서 계급정치운동의 과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제로 한국의 노동자운동과 정치운동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노동자 정치운동의 역사와 80년대의 복원․재평가
80년대 이후 노동자운동과 정치운동의 역사를 재정리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단절된 노동자 정치운동의 역사를 복원․재평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최근 노동운동사에 관련된 연구 결과들이 논문이나 단행본 등으로 발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거의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발전과 투쟁, 사건들이 정리되어 있는 수준이지, 노동운동의 발전을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동자 정치운동 간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정리한 글을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몇 가지 논문들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되는 수준입니다.
물론 이는 87년 대투쟁 이후 90년대 초반에 노동자민중 정치운동 역량이 거의 왜소화되면서 노동자민중운동이 대중조직운동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현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87년 이후 노동자 대중운동의 발전은 노동자정치운동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록 대중운동의 성장에 걸맞게 노동자 정치운동 그 자체가 진전되지는 못했지만, 노동자 정치운동을 대중운동 속으로 해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가 현실의 실천적 과제로 되는 상황에서 80년대 이후 시도됐던 노동자 정치운동의 역사를 복원하고 재정리하고 평가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입니다. 노동운동과 계급정치운동의 결합이라는 관점을 역사 속에서 복원하고 재평가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의 역사나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경험을 총괄정리하여 계급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 봅니다.
두 번째로 80년대 노동자 정치운동에 대한 재평가, 역사적 자리매김 작업이 시급하다는 점입니다. 90년대 초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80년대에 대한 평가와 정리와 관련해서 사실상 80년대에 정치세력화를 위해 투쟁했던 동지들이 어떤 평가도 없이 청산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90년대 초중반에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운동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80년대가 거의 왜곡되거나 무시되어, 청산될 무엇인가로 다뤄져 왔습니다. 지난 80년 이후의 계급정치운동을 지금 재평가함으로써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 중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 공세로 인한 과제와 함께 80년 이후 제기된 많은 문제점들 속에서 계승점과 부정할 것들을 명확히 하고 21세기 계급정치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왜 80년이 분기점인가?
한국 노동자민중운동, 사회운동, 계급정치운동의 역사에서 80년이 분기점이라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남한사회 내의 계급모순에 기초한 노동자민중운동, 사회운동, 계급정치운동이 새롭게 출발했다는 점에서, 즉 새로운 주체형성이라는 점에서 80년대는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역사에서 분기점입니다. 53년에 한국전쟁이 종전된 이후 남과 북에는 이질적인 체제가 자리잡았습니다. 이 때 남한사회에서는 자본주의를 위로부터 정착시키기 위한 민간독재․군부독재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 내에는 일제하 이후의 변혁운동세력이 대부분 정리됩니다. 53년을 기점으로 변혁운동의 역사가 단절됩니다. 이후 남아있는 잔존 역량을 중심으로 통일운동과 최소한의 진보정치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나마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대부분 탄압으로 깨지고, 이후에는 지하당 건설 시도가 이루어집니다. 가령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조작의 측면도 있지만 62년도의 인혁당 사건, 68년의 통혁당 사건, 74년의 인혁당 사건, 79년의 남민전 사건 등의 지하당 구축 흐름이 전개됐습니다. 이러한 흐름도 79년 남민전 사건을 계기로 단절이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은 한국 사회 자체의 계급모순의 폭발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자․학생투쟁이 민중항쟁으로 발전해 간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기존의 변혁적 정치운동과 달리 한국 사회 내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계급모순에 기초하여, 이 계급모순의 해결을 주된 목표로 하는 새로운 계급정치운동의 주체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둘째, 70년대까지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운동․정치운동은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투쟁이었는데, 이는 주로 자유주의적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 정치적 주도권 역시 보수야당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자유주의적 민주화투쟁으로는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변혁운동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대중적 각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한 보수야당의 정치적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혁적 정치지도부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자각 역시 새롭게 이루어집니다.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인식은 이런 점에서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의 소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변혁운동의 주체가 노동자민중이며 노동운동과 변혁적 정치운동의 결합이라는 사상도 초보적인 수준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이후 노동자민중정치운동 관점에서 보면, 80년 광주항쟁에서 87년 6월까지,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96~97년 총파업까지, 그리고 96~97년 총파업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대중투쟁이 전개되고 그 투쟁의 성과가 조직 건설로 이어지고, 다시 이러한 조직적 성과에 바탕하여 전국적인 대중투쟁이 새롭게 폭발하고 새로운 조직화가 이뤄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80년 민주화의 봄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80년대에 대해서 최근에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표현들을 합니다. '위대한 각성과 새로운 주체형성의 시대'라고도 하고, '저항전과 기동전의 시대', '광주를 전국화하기 위한 혁명의 시대', '악몽의 시대'였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80년대의 출발은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입니다. 79년 10월 26일 절대권력자인 박정희의 피살 이후, 지배계급 내부의 혼란과 분열의 틈을 뚫고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의 봄'입니다.
10․26 이후 5․17까지 노동자투쟁은 쟁의가 800여건이 넘을 정도로 광범하게 전개됩니다. 체불임금청산과 노조민주화에 이르는 다양한 투쟁이 전개됩니다. 이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와 탄압의 고삐가 느슨해 질 때는 언제든지 노동자들의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를 내걸고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이와 같은 양상은 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되풀이됩니다.
80년 민주화의 봄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사북지역 동원탄광 노동자들의 지역점거투쟁과 한국노총 민주화투쟁입니다.
사북지역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지역점거투쟁의 경우, 어용노조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이 지역점거투쟁으로까지 발전한 사례인데, 이는 이후 대공장에서의 공장점거투쟁, 지역점거투쟁의 원형을 보여주는 단초였습니다. 즉 노동자들이 투쟁이 자생적으로 격화될 때 최종적으로 경찰력과 부딪칠 때 방어적인 무장투쟁으로까지 진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몰론 언론에서는 폭동으로 기록됩니다.
한국노총 민주화투쟁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주체들에 의해 이뤄진 투쟁이었습니다. 이들은 80년대 민주화의 봄이라는 정치정세 속에서, 투쟁목표를 한국노총의 민주화에 두고, 한국노총회관에 집결하여 노총민주화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투쟁은 80년대 노동운동의 노선과 관련하여 중요한 논란의 지점이 됩니다. 80년 5월에 신군부의 등장에 맞선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게 되는데, 5월 중순에 학생들이 서울역으로 집결하다가, 학생운동 지도부 일부에서 한국노총회관에서 농성 중인 민주노조 지도부에게 신군부에 맞선 노학연대투쟁을 제안합니다. 당시 70년대 민주노조지도부는 몇 가지 이유를 근거로 노학연대투쟁을 거절합니다. 하나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신군부에 맞서 투쟁할 준비와 역량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역량도 안 되는데 학생들과 연대정치투쟁하면, 있는 역량도 깨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자신들은 한국노총 민주화를 목표로 투쟁하겠다는 것을 근거로 제안을 거부합니다. 이후 이 노학연대투쟁의 거부에 대해 학생출신 활동가들은 조합주의, 조직보존주의라 비판하면서 이후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계속 논란거리가 됩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세력이 노학연대를 받아들여 신군부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신군부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등장 이후 전면적인 노동운동 탄압으로 결국 82년경에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모두 해체되어 버립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란 참으로 냉혹합니다. 준비 여부와 관계없이 전체 계급역학관계의 변화가 특정 시점에서는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80년 민주화의 봄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가 집약적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한계 역시 동시에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세력 가운데 일부는 신군부의 탄압에 맞선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점에 대해 반성적으로 평가하면서, 다시 현장으로 들어가 몇 년간의 준비와 투쟁을 거치면서 85년 구로동맹파업을 조직해 냅니다. 이처럼 노동운동의 역사적 한편으로는 탄압으로 단절되는 듯 보이지만, 투쟁의 주체들에 의해서 이어집니다. 결국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80년 민주화의 봄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그 한계가 드러났고,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반성적 평가와 실천 속에서 80년대 노동운동으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80년 광주민중항쟁
80년 광주민중항쟁은 80년 '민주화의 봄'이 광주라는 지역으로 고립된 결과입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전개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관련한 몇 가지 교훈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광주민중항쟁의 전 과정을 보면, 한국 사회 내에서 민주화투쟁이 변혁적인 투쟁으로 진전되는 전형적인 양식이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학생들이 학원을 거점으로 가두투쟁을 전개합니다. 이것이 진전되면 특수경찰이 투입되고, 가두에서 투석전으로 진전되면서 시민들이 가세를 하게 됩니다. 가두에서 시민들이 결합되면서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특수군대가 투입되고, 투쟁은 자연발생적으로 무장투쟁으로까지 발전합니다. 이 때 며칠 간 무장시민군이 지역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서 투쟁을 전국적인 투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전국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면 엄청난 변혁적인 동력으로 확산되는데, 이를 뚫지 못하고 고립되면 시민군 내부는 항전파와 수습대책위로 나뉘게 됩니다. 이때 항전파가 수습대책위를 뛰어넘지 못할 때는 투쟁이 곧바로 정리됩니다.
이러한 투쟁의 발전과정들은 이후 한국 사회 내에서 여러 투쟁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 이후는 학생운동의 선도투를 말하는 것도 그러한 합법칙적인 발전을 전망하면서 변혁운동의 가능성들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90년대 초중반까지는 대략 이러한 상(전민항쟁)을 가지고 투쟁이 전개됐습니다. 그러던 것이 노동자의 대중파업을 중심으로 시민과 학생의 투쟁을 결집시켜내는 양식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이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은 현실의 계투의 역동적인 발전 속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문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국적 수준에서 노동자민중투쟁을 지원․지도할 수 있는 지도력과 조직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전개과정에 투쟁의 승리 여부는 지역으로 고립된 투쟁을 전국적 투쟁으로 발전시켜 낼 수 있느냐였는데, 결국 신군부의 물리력에 의해 고립되어 패배하게 됩니다. 80년 민주화의 봄의 정점인 광주민중항쟁이 지역적인 고립을 뛰어넘지 못한 결과, 광주민중항쟁은 '광주'라는 지역의 문제로 협소화되어 버리고, 투쟁의 정치적 성과는 김대중이라는 보수야당세력으로 귀결되어 버립니다. 광주민중항쟁은 결정적인 국면에서 누가 승리하느냐에 의해 이후 정치적 방향이 판가름난다는 사실을 냉엄하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국면에서의 승리는 전국적 수준의 투쟁에서 결정난다는 점을 확신시켜 줍니다. 전국적 수준에서의 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할 수 있는 정치지도력을 일상적인 시기에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가, 이 점이 광주민중항쟁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관련해서 남긴 첫 번 째 교훈입니다.
두 번째는 투쟁대오 내부의 주도권 문제입니다. 광주민중항쟁에서도 드러나듯이 투쟁의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투쟁의 방향을 둘러싸서 투쟁지도부 내부에 항전파와 협상파로 날카롭게 대립하게 됩니다. 학생들의 가두투쟁에서 시작했지만, 투쟁이 발전되면 노동자들이 개별적인 참여에서 조직적인 참여로 진전됩니다.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으로 서나가면서 투쟁주체의 계급적 성격은 강화됩니다. 바로 이러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시민군의 주축이 되고, 투쟁 지도부 내 항전파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서 수습대책위라는 타협적 지도부가 등장합니다. 계투의 현실에서는 바로 이러한 수습대책위라는 타협적 지도력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조직력의 구축이 관건입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바로 투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타협적 지도력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조직력 역량을 구축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패배의 대가, 그리고 80년의 유산
결국 80년 민주화의 봄은 광주민중항쟁의 패배로 막을 내리고,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패배의 대가는 가혹합니다. 신군부세력들은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온건하게 조합활동을 하는 노조 간부조차도 삼청교육대로 보내고, 노조체계도 기업별 노조체계로 바꾸며, 복수노조금지조항 신설, 제3자개입금지조항 신설 등 노동법을 개악하고, 나아가 반공법을 개악하는 등 이념적 운동까지 탄압하게 됩니다. 조직보전을 위해 투쟁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곳도 예외 없이 전면적 탄압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조직사건들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정치적 변혁운동의 구심을 구축하고자 했던 전민노련, 전민학련 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야학도 전면적으로 탄압합니다. 이는 광주항쟁 패배의 대가인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탄압 속에서 급진적인 노동운동이 새롭게 성장하는 조건을 형성하게 됩니다. 광주항쟁 패배이후 전두한 신군부세력이 야당정치인들 발목을 묶고, 정치운동에 대한 탄압을 전면적으로 하여 84년 말까지 묶어둡니다. 그러다가 84년 말, 유화국면―당시 야당정치세력들을 풀어주는데, 이들도 묶어두면 양당까지 급진적 흐름에 들어갈까 봐 우려하여 풀어줍니다―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 강화, 노조설립신고필증 교부 거부 등 여전히 노동운동 탄압은 계속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틈이 벌어지게 되죠. 정치적 공간이 조금 열리자마자 노동운동이 전개되는데 그 포문은 대구 택시노동자들이 열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도청진격투쟁에 앞장섰던 세력이 바로 택시노동자 등 운수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유화국면의 틈을 비집고, 신규노조건설투쟁, 해고자블랙리스트 철폐투쟁 등을 전개하면서 400여개의 신규노조가 결성됩니다. 80년대 초반 신군부의 탄압에 의해 깨졌던 70년대 민주노조운동 세력들은 83년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노동법개정투쟁―당시는 청원적 수준의 노개투―을 전개해갑니다. 그리고 70년대 대표적 민주노조의 하나인 청계피복노조도 합법성쟁취투쟁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노동자투쟁 속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더욱 급진화되고, 급진적인 노동운동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70년대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과는 달리, 학생출신 활동가들과 노동자출신활동가들이 한국 사회의 모순은 체제변혁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보수정당과는 다른 변혁운동진영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현장에 투신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실천이 80년대 중후반까지 이어지면서 급진적 노동운동, 정치운동의 흐름이 형성됩니다. 8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 정치운동을 둘러싸서 지금까지도 여러 평가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는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뒤이은 신군부의 등장의 산물입니다.
8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정치운동
80년대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급진화는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사회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서구에서도 68혁명 이후 소위 신좌파적인 이념과 문화가 전사회적인 문제로 파급되어 갔듯이,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은 한국 사회 전체의 급진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앞선 부분에 급진적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정치운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반성적 평가를 통해서, 이제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수준을 넘어 변혁운동을 해야 한다는 점, 노동자 민중의 자생적 투쟁을 체제변혁적 투쟁으로 전환시키려면 목적의식적 전위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근본적 사회변혁에서 노동자 민중이 중심이 되도록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점, 나아가 반제투쟁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는 점 등을 자각하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곧바로 조직적 실천을 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반성적 평가와 운동의 전망을 바탕으로, 80년대 초중반에 학생출신활동가들은 시위를 통해 징역으로 가든지, 현장에 들어가든지 선택하게 됩니다. 수도권에서만도 1천여명이 넘는 학출 활동가들이 현장에 들어가고 현장에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성과들이 85년부터 구로동맹파업, 대자투쟁, 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투쟁 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급진적 학생운동․노동운동․정치운동세력들은 한편으로는 현장투신이나 노학연대 가투를 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서 투쟁방향과 전술, 한국 사회의 성격과 변혁의 성격 등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벌입니다. 80년 서울역회군을 둘러싼 논쟁, 무림사건과 학림사건으로 드러난 논쟁, 그리고 82, 83년 노동자민중주체 역량 강화에 투여하자는 야학운동입장과 학생의 선도투를 강조한 주장간의 논쟁 등이 전개됩니다. 이어서 85년에는 투쟁목표가 반파쇼냐 반미냐를 둘러싸서 논쟁이 전개되고, 이러한 논쟁의 와중에 일부 학생운동세력을 중심으로 소위 주사파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논쟁들이 이후 전체운동의 투쟁목표와 방향, 노조와 정치조직 관계 등, 그리고 변혁하려는 한국 사회 성격 규명과 변혁의 성격에 관한 논쟁까지 전개됩니다. 이런 정치노선에 따라 CA, NL, PD 등이 정파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조직노선을 둘러싸서는 정치적 대중조직, 대중적 정치조직, 혁명적 정치조직 등의 논쟁이 전개되고, 이러한 논쟁은 86년에 본격화됩니다. 이런 논쟁구도 속에서 형성된 주체들이 87~88년을 거치면서 출현한 현장의 노동자출신활동가들과 결합하게됩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출현한 민주노조운동의 1세대들은 80년대 중반 급진적 경향들과 맞닿아 있습니다.
8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정치운동의 한계
그런데 8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은 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지 못합니다. 이는 급진적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역사가 짧아 계급운동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고, 동시에 노동자민중운동이 그만큼 성장하지 못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운동의 이념과 이론 역시 매우 취약했음이 이후 객관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전체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이념 자체가 불투명했을 뿐만 아니라, 투쟁의 전술적 차이가 곧바로 조직분열로 이어지면서, 분파적 질서를 당적 질서로 진전시켜 나갈 정치적 지도력과 대중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더욱 분파화․왜소화되다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조직적․정치적으로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노동자민중의 전위적 정치지도력을 지향했지만, 현실의 노동자민중투쟁에서 고양된 지점을 전취하지 못한 채 조직운동의 계급적 뿌리가 없는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80년대말 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는 8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정치운동의 이념적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조직운동은 청산되거나 왜소화되어 버리고, 80년대에 현장으로 투신했던 많은 활동가들이 현장을 이탈하게 됩니다. 물론 8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정치운동의 흐름이 90년대에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계급적 노동자 정치운동을 복원하고 재구축하려는 노력은 힘겹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등장했던 80년대의 급진적 노동운동․정치운동은 운동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이 아닌 변혁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모색 등의 디딤돌을 놓았지만, 이념적 이론적 취약성과 정치적․조직적 지도력 구축에서의 한계 등으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중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지 못함으로써 다시 주변화․왜소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문제가 현실의 과제로 되면서 8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정치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재평가하고 재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당시 조직활동과 대중활동의 경험, 그리고 이념과 전술을 둘러 싼 논쟁 등은 이미 낡아버린 것도 많지만, 역사란 '단절'과 '계승' 속에서 발전한다는 점에서 시급히 정리해야 할 과제입니다.
85년 대우자동차 노동자파업과 구로동맹파업
85년도는 80년대 노동운동의 분기점이자, 70년대와 80년도를 대중적으로 극복하고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90년대 노동운동의 지평을 연 해였습니다. 85년 4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투쟁과 6월 구로동맹파업투쟁이 그것입니다.
84년 8월 이후 상여금 지급문제와 군필자 호봉 승급문제를 출발로 하여, 85년 4월 임금인상 시기에 이삼천명의 노동자가 9일동안 공장점거파업투쟁을 벌여 18%의 임금인상을 쟁취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80년 이후 최초로 중공업의 남성노동자들이 주도한 대규모 파업투쟁의 가능성과 투쟁의 엄청난 파급력을 유감 없이 보여준 투쟁이었습니다. 85년 4월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점거파업투쟁은 그 때까지 폭발적이긴 했지만 일회적이고 자연발생적 투쟁에 머물렀던 대규모 중화학공업의 노동자들의 투쟁이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는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84년 이후 투쟁의 준비과정에서 상여금 문제와 군필자 호봉 승급 문제 등의 요구를 중심으로 일상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간 점, 이러한 일상적 투쟁 속에서 노조민주화 세력을 결집해 나간 점, 그리고 85년 4월 임금인상시기를 앞두고 [근로자의 함성]이라는 유인물을 내고 공청회 등을 주최하여 현장의 열기를 고조시켜 나가면서 그러한 대중동력을 바탕으로 조합원 비상총회를 이끌어 내고, 현장 시위를 전개한 점, 나아가 이러한 대중투쟁동력에 기초하여 어용 노조의 집행부를 제치고 농성 대표자가 사측과 직접 협상하여 승리를 쟁취한 점 등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공장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전형을 예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8월 25일, 협상의 극적인 타결로 국가권력의 개입과 탄압에 맞서는 대중적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의 승리는 당시 임금가이드 라인(5.2%)를 무력화시킴으로써 85년 상반기 전국적인 임금인상투쟁에 자신감과 활력을 주었습니다.
또한 84년에서 85년에 이르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장에 투신한 학생 출신 활동가들과 현장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전개한 것으로, 당시 '급진적 노동운동'이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85년 6월 22일 구로지역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의 구속에 항의하여, 6월 24일 대우어패럴노조, 가리봉전자노조, 효성물산노조, 선일섬유노조, 남성전기노조, 세진전자노조 등 8개 사업장 7,000여명의 노동자들이 벌인 5일간의 동맹파업과 연대투쟁은 53년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부장관 퇴진, 구속노동자 석방, 노동3권 쟁취'를 요구한 초보적 정치파업으로서 노동운동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투쟁이었습니다.
구로지역 노동자들이 정부의 민주노조탄압에 맞서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인근지역 노조들의 지지농성, 점심식사 거부투쟁, 노동운동단체의 가두시위 및 지지농성, 나아가 사회 여러 계층의 지지투쟁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1980년대 초 정부의 탄압에 개별노조로 대응하면서 와해됐던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보존 논리와 조합주의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이 기업별 노조의 제약을 뛰어넘어 연대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단위 사업장에서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요구'와 정부의 노조탄압에 의해 노동자들의 공통된 요구로 발전된 '정치적 요구'와 결합"하여 투쟁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역량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기본 대중조직으로서 민주노조운동을 일반화시키는데 기여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시기에 민주노조의 건설로 전면화되었습니다.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을 결성한 후, 동맹파업의 성격과 동맹파업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에 대한 평가논쟁('노동조합 건설'을 중시하는 입장과 '대중정치노선'을 주장하는 입장간의 논쟁)을 거쳐 1985년 8월에 '노동운동탄압투쟁위원회', '청계피복노동조합',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분리파' 등과 결합하여 '서울노동운동연합'을 결성합니다. 서울노동운동연합의 결성은 대중정치노선의 주도 하에 "동맹파업이 보여 준 대중투쟁의 위력과 노조의 대중조직으로서의 가능성을 일면 부정하고, 동맹파업의 정치적 성격, 지역 정치소모임 활동가들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가두정치투쟁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86년 5월 3일 인천사태에 뒤이은 정부의 탄압과 내부의 노선투쟁으로 결국 1년만에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가두정치투쟁 중심의 활동을 비판하는 기조와 맞물려 동맹파업의 대중적 연대투쟁의 성격에 주목하면서, 그를 현실운동에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와 실천이 이루어졌고, 이 와중에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계승됩니다.
소위 '국가보안법 조직사건'
80년대 노동운동․노동자 정치운동은 사실 소위 '조직사건'을 통해서 그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85년 12월 기점으로 86년 말까지 1년간 국보법 관련 조직사건이 대대적으로 이어집니다. 변혁적 정치세력화, 전위정당 건설이라는 다양한 시도들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이 당시는 비합활동이었고 써클적 수준에서 활동했으므로 잘 몰랐는데, 조직사건을 통해서 확인되었습니다. 80년대 급진적 정치운동은 두 차례의 조직사건을 겪게 되는데, 85년 12월부터 86년 말까지가 '제1차 조직사건'이고, 89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가 제2차 조직사건입니다. 제1차 조직사건은 85년 12월의 깃발사건(플래그)-학림계열, 86년 3월 보임다산사건, 5월의 서인노(서노련인노련)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5월 구학련(구국학생연합)사건, 맑스레닌주의당사건 등으로 이어집니다.
제2차 조직사건의 경우는 80년대 말에 인민노련, 삼민동맹사건, 노동계급, 제파PD사건, 사노맹, 한사노사건 등으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새롭게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던 흐름들이었습니다. 80년 이후 4~5년을 주기로 해서 노동자투쟁의 고양에 따른 투쟁의 성과를 조직적으로 수렴해가려는 지점에서 공안탄압이 전면화되어 왔습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노동자 독자적 정치세력화 흐름이 이런 속에서 단절, 와해, 고립 분산화되면서, 의미있는 전국적 정치세력으로 조직될 수 있는 것이 계속 탄압당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사건은 대체로 내부 선전써클단계에서 한 단계 넘어서서 대중선동으로 넘어가는 과정, 즉 직접적으로 대중운동에 개입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조직내부의 분열을 통해 조직이 와해되는 경우에는 주로 조직부와 편집부간의 분열이 나타납니다. 조직부는 현실지점에 맞닿아서 사업하고 선전담당은 이론지점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러한 조직부와 편집부간의 분열은 편집부의 경우 현실의 구체적 부분들을 해석해 주고 방향을 제시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고, 조직부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이론화할 능력이 없다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80년대 급진적 정치운동의 경우 써클단계에서, 혹은 써클단계를 넘어서려는 과정에서 대부분 와해되는데, 이러한 분열과 와해로 자신들의 정치역량과 조직역량을 축적해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학습을 통한 선전지도력으로 현실 계투의 다양한 경험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전망을 제출하지 못할 때, 이는 조직적 규율 자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조직운동에 대한 부정적 경험을 누적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정적 경험들이 90년대 대중운동 속에서 80년대의 급진적 노동운동의 경험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다가 거기 있는 어린애까지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듯이", 80년대 급진적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의 경험은 외면하고 청산한다고 해서 정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80년대의 급진적 노동운동․정치운동은 여러 문제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자유주의적 반독재민주화투쟁과 조합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고, "자유주의적 야당세력이나 재야명망가들을 대신하여 반독재민주화투쟁의 대외적 주도권과 대국민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정도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했지만", '변혁운동의 전망'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지속적으로 모색함으로써 90년대 노동운동의 이념적․조직적 디딤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변혁적 노동운동의 모태'로 역사적인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사상이론과 실천을 투쟁 속에서 결합시켜 나가고, 현장의 대중투쟁을 정치투쟁과 결합시켜 나가고자 했던 시도들, 그리고 투쟁의 전술에서부터 한국 사회와 변혁운동의 성격을 둘러 싼 치열한 논쟁들은 그 한계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복원해 나가야 할 점들입니다. 90년대 10년간의 노동운동의 경험까지를 포함하여, 80년대의 급진적 노동운동․정치운동의 사상이론과 실천을,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전망 속에서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고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야말로 8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을 진정으로 계승하고 또 그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해 나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애로사항은 이론적 지도부와 현장실천가들의 갭을 없애는 문제인데, 그와 관련하여 의견을 말씀해주시지요.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고, 현장 일을 하다보면 계획보다 흐름을 잡을 수도 없이 가기도 하는데, 지침과 실행의 어려움 등으로 일이 안되고, 감정대립이 생기기도 하거든요.
추상수준에서 다를 수도 있는데, 한 조직이 있으면, 이 조직이 정치조직이라 하면 변혁적인 부분에서 이론적 내용들은 주로 한국 사회(와 세계자본주의)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중심으로 방향을 제출할 거란 말이에요. 그게 80년대 정파 써클운동 과정 속에서는 이론영역을 담당한 것이 기관지(비합)를 통해 제출됩니다. 그런데 실천영역은 A공장, B부문 등의 구체적인 부분을 가지고서 방향을 제기해줘야 하는 것이고 구체적인 현실에서부터 규정력이 오는 것이잖아요. 이러한 답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들이 계속된단 말이에요, 이런 이론과 실천간의 긴장은 사실, 세계운동사에서 수천년 동안 노예들, 농민, 노동자운동 역사에서 끊임없이 생기는 것이고, 없을 수가 없어요. 이러한 긴장 자체가 없으면 운동이 아니에요. 먼저 이러한 이론과 실천간의 긴장 자체를 인정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이 긴장을 어떤 방향으로 해결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 긴장이 조직강화와 운동의 발전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조직을 분열시키고 약화되는 방향으로 귀결될 거냐의 두 가지 방향이 있는 겁니다.
이런 긴장이 80년대는 분열의 방향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고, 깨지는 방식이 이론과 실천간의 분리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론적 차이가 곧바로 조직적 분열로 가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식민지국독자냐 신식민지예속국독자냐라는 이론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조직이 나눠져요. 그것은 이론적 차이를 내부의 정치적 구심을 갖고서 그 속에서 이론적 차이를 계속 확인, 검증시켜주는 정치적 구심들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보거든요. 특정시점에서의 정치적 목표를 뭘로 할거냐는 거에요. 갈라서 갈거냐, 조직내부의 검증이 가능한 목표로 동의하고 조직할 지도력이 요구된다는 것이거든요.
입장차이가 조직분화가 될 만큼의 차이냐, 정치를 우위를 두고서 입장차이를 조직 내에서 투명하게 드러내어 차이를 상호 인정하고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이론과 조직, 정치적 관계들에서 조직 내부 정치, 지도력을 중심으로 한 문제해결 여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실 자체를 투명하게 드러내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해결이 어떠해야 할지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해결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이해하고 과정과 평가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조직적 실천에서 당장 움직이는 경우는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하고 경험을 객관화 정리시켜가는 과정을 통해 갭을 좁혀가고 갭도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갭을 좁히는 방향을 찾고 당장 해결가능한지 여부도 인식하는 권위와 조직원들의 훈련과정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도 직접 경험해왔기 때문에 80년대를 보면 이론자체도 굉장히 취약했다는 거에요. 원전 몇 개 읽은 것을 자신의 입장으로 고정불변한 것으로 관철시키려 하고,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뿌리도 취약했던 거죠. 지금은 새롭게 경험을 정리할 시점이라 봅니다.
다음으로, 현실적으로 현장 계급운동에 뿌리박는 것이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런 경험 속에서 이론적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단단히 활동해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못했다는 것이 한계였다는 거죠.
어느 조직이건 한 조직 내에서 특히 학생운동 출신 조직 같은 경우 학습에서 출발하여 입장을 정하고 현장에 가면 실제 현실을 설명하는 게 어려워서 거꾸로 지도부에게 요구가 올라가게 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역량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여기에서 갈등이 생기고 깨지는 경험도 많이 겪었거든요. 지금은 그 정도로 선전써클 수준에서의 운동이 아니고 민노운동이 정치총파업을 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학습소써클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이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많은 새로운 시도들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쟁의 결과물로 정치세력화를 생각해보는데, 상설공투체와 관련해보면, 한국에서 계급, 민족, 분단 문제를 풀어야 할 터인데, 한국의 특수성인 민족과 분단문제에서는 변혁적 입장을 세웠다고 보지만 당면 과제에서는 정립이 안되어 있습니다. 계급정치의 중심세력이 민족모순과 분단문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와 방향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계급적 좌파진영의 흐름이 80년 이후부터인데, 초창기에는 계급문제, 생존권 우선이라는 논의지형이었는데, 최근에는 이 문제가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민족의 문제를 계급적 관점에서 다시 해석해야 하는 시점에 직면하고 있다고 봅니다.
몇 가지 지점이 있는데, 반제반미투쟁도 최근 제기되는데, 이에 대해 반제투쟁이 신자유주의투쟁의 핵심적 문제라고 보는데요. 반미라는 것의 대중적인 기초들, 노동자들의 계급투쟁 경로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노동자계급이 전면적, 대중적 반미계급투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대국가적 투쟁이 정점에 오를 때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또한 통일문제 관련해서는, 아직 내부에 두 가지 가닥이 있는 것 같아요. 1) 노동자민중적 통일에 대한 대안을 놓고 접근하자는 흐름 2) 좌파와 계급운동 진영의 역량으로 볼 때 통일운동 조건이 아니므로 평화체제 정착 수준에서 대응하는 것, 그리고 주체형성을 더욱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와있는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에 맞선 생존권투쟁에서 반제반미투쟁이라는 것이 자칫 대정권투쟁과 분리되면 안 된다는 점, 반제는 미국만이 아닌 국내외독점자본이 포함된 정치적 표현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현실의 매향리, 소파투쟁, 주한미군기지 투쟁들을 보면 작년 계기로 하여, 그전의 청년학생 중심이 아닌, 지역주민들 중심의 투쟁으로 발전한다는 진전이 있는 것이고, 계급적 기초로 조직을 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단기간 내에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도 노동자들에게 선전, 교육하면서 진전시켜가야 한다고 봅니다.
운동의 흐름을 '급진화'라는 것으로 매개시키고 있는데, '급진화'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의미에 대해 질문합니다. 또한 80년대 노동운동 자체를 '급진적 노동운동'으로 말씀하고, 그 후를 '변혁적 노동운동'이라 하는데 그 구분의 근거와, 80년대가 주체사상과 ML(맑스레닌주의)이라면 90년대는 무엇으로 규정하실 건지요?
'급진화' 문제와 변혁적 노동운동의 의미를 저는 같은 의미로 본 것이구요, 급진화를 근본적 모순에 접근한다는 의미로 보고, 체제변혁적 운동으로 접근한 것이구요. 급진화에도 내부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죠. 체제 변혁이라도 어떤 수준의 변혁으로 상정하냐에 따라서 다르겠죠.
80년대는, 광주항쟁으로 인해서 주사, 맑스주의가 있는데, 후자도 이 때 맑스주의 그 자체로서 연구되고 정리된 게 아니었고, 그 진영 내부에서 이념적 수준들이 가령 스탈린주의적으로 정리된 부분도 있고 트로츠키적으로 정리된 것도 있고 뉴레프트적(신좌파적)으로 정리된 것도 있거든요. 80년대 소개될 때의 내용과 수준은 초창기 도입시점에서의 원전 자체로서 정리된 게 아닌 취약하게 해석된 것들이고, 이것이 현실사회주의권 붕괴가 되면서 그런 흐름들도 단절되어 버리거든요. 저는 거꾸로 지금시점이야 말로 맑스주의 원전 자체를 새롭게 재해석해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국면이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로 될 거 같던 것이 오히려 현실자본주의의 모순이 전면화되고 있고, 기존의 맑시즘에 대한 왜곡된 흐름들까지도 현실사회주의 경험을 재정리하여 이념적 문제들을 새롭게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합니다.
맑스주의는 일정하게 복원해가고 있는데, 기존의 권위 있는 이데올로기들이 있는 상태가 아니므로 권위 있는 창조들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저는, 여지껏은 현장을 지도하고 투쟁을 지도해야 하는데 못한 역사에서 현장을 이론이 갈라지는 것이 현실에서 크게 나타난다고 봅니다. 근본적인 이론의 차이 땜에 현장의 일이 안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봐요. 큰 생각의 차이에 따라 현실 투쟁에서도 차이가 나거든요. 현실투쟁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이론적인 차이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론적 차이가 현장을 가른다고 이러한 차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론이 검증되고 자기 책임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므로 이론과 입장의 차이는 투명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봅니다.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같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장과 이론조차도 현실투쟁의 경험을 현실해석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책임지고 검증받게 하는게 중요하고 당면투쟁에서는 같이 해나가도록 하는 것이 진전된 운동이라 봅니다.
예로, 어느 현장에 여러 입장을 갖는 써클들이 있어요. 그런데 여러 써클들 간에 공동활동이 안 되는 거에요. 현장의 민주파를 다 합쳐도 안 되는 게 있어요. 입장의 차이는 현실투쟁과 노자간의 힘 관계에서 잘 풀려나가면 그게 다 동력이 되는데, 안될 때는 문제가 되거든요. 집행부와 현장조직의 갈등, 입장이 다르다고 이탈하는 등. 이런 문제의 해결방안은 무조건 하나로 하던지, 아니면 다 입장대로 찢어지자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활동가가 부서별로 현장조직체계를 새롭게 재구성하자는 안을 제출했습니다. 부서체계 속에서는 단일화하고 이 결정에서는 누구나 동의하고, 그 부서별 체계 내에서 협의적 센터를 만들어 그 사업장 전체 사안을 결정하도록 하자는 안이고, 그러면 현장 내에 여러 써클들이 책임 있게 입장을 제출하고 자신들의 활동은 이 부서별 체계 내에서 같이 하도록 하는 내용을 제출했습니다.
이 방안이 둘 다 살릴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물론 입장의 제출만이 아니라 그러한 입장을 관철해 나갈 실력도 필요하지만요. 그렇지만 그들이 또 찢어지면 대중적 입장에서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서단위의 현장으로 보내는 거죠. 그 사업장의 현장조직력이 부서 수준에서 다 무너져버리게 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부서단위의 통일된 활동을 만들어가자는 제안인거죠.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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