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어느날,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정은(소피아·50) 수녀에게 두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하나는 한국의 수도원에서 귀국을 종용하는 내용, 다른 하나는 장학금과 함께 박사 과정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나쁜 수녀'가 되기로 작정하고 그 길로 한국의 수도원과는 영영 작별했다. 그 후 미국 홀리네임스 수녀회에 들어가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영성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 수녀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사 승무원을 거쳐 가톨릭신문사 취재기자로 일하다가 스물여덟살 때 늦깎이로 수녀가 됐다.
현재는 미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홀리네임스 대학 영성학 교수로 '영성과 사회정의'를 가르친다. '여성의 원(The Circle of Woman)'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그는 이방인, 경계인의 삶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다. 또
샤머니즘과 불교 수행 등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여름방학 때마다 귀국해 경기 양주의 무속인 공동체 '청향사'에서 무당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 독특한 이력의 여성 신학자가 귀국했다. 지난 19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서강대 옆 예수회센터 이냐시오 카페에서 열린 초청 강좌에서 박 수녀를 만났다.
수녀복을 입지 않은 박정은 수녀가 지난 19일 서울 예수회센터에서 '여정은 계속된다'는 주제의 강연을 하고 있다. |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제공
▲ 위험한 자본주의 사회 종교가 가야 할 길은 결국 '인간성의 회복'
갖지 못한 사람들 위한 격려·위로가 교회 역할이날의 주제는 '여정은 계속된다'. 행사를 주최한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한상봉 편집국장은 "내면적인 영성 자체가 굉장히 자유로운 여성 전사"라고 박 수녀를 소개했다.
"왜 어떤 사람은 고통으로 망가지고, 어떤 사람은 고통을 겪은 뒤 큰사람이 되는 걸까요? 그건 개인적인 영성과 힐링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영성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 그런 공동체에서 나의 눈이 열리고 타인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박정은 수녀는 행복한 삶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 영성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그가 속한 홀리네임스 수녀회는 수녀복을 입지 않는다. 50여명의 참석자들은 편안한 옷차림의 박 수녀가 유쾌한 수다를 섞어 풀어내는 진솔한 삶의 여정과 섬세하고도 깊이 있는 종교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왜 하늘나라가 멀리 있다고, 어렵다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찾는 하늘나라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참 쉬운 곳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 쉽고 자연스러운 걸 하세요. 정의를 위해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면, 싸우세요. 놀고 싶으면 놀고,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먼저 다가가세요. 내 안에 있는 거, 내가 원하는 걸 하세요. 그게 행복한 하늘나라거든요."
박 수녀는 "상처는 스타킹에 난 구멍과 같아서 의식할수록 더 크게 느껴진다"면서 "상처를 감추려고 애쓰거나, 상처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말했다.
"상처는 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너도 상처가 있고, 너도 죄졌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죠. 힐링은 성형수술로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에요. 내 상처의 무늬를 아름답게 바꾸고, 그 상처를 통해 보물을 얻을 때 치유가 되는 거죠. 상처가 없는 사람은 인간미가 없어요."
박 수녀는 한국 수도원 시절,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교회의 구조 때문에 수녀의 꿈이 꺾이는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수녀답지 않게 당돌하고 자유분방한 자신의 성격을 바꾸고 싶었다. 그런 고백을 들은 사제는 "하루 중 낮 12시에는 마당에 세워둔 막대기에 그늘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시간에 사진을 찍으면 찌그러지고 작게 나온다. 있는 그대로 그늘을 받아들이고 겸손하면 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 수녀회에서 쫓겨났을 때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런 그가 눈여겨보게 된 것이 '상처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그는 "무당들의 공동체에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따뜻함을 겪으며 내 아픔을 나눠야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박 수녀는 신앙인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과 하늘나라,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경계인이라고 설명했다. "진정한 '순명'은 하느님을 거스르고 세상을 따르는 게 아니라 세상을 거스르고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라며 "교회에 발을 걸치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경계인의 영성"이라고 설명했다.
"20~30대 때는 야망을 크게 갖고 실컷 깨져보세요. 중간에 그 길이 아니다 싶을 때는 이츠 오케이, 때려치우면 됩니다. 젊은데 뭐 어때요? 실패가 우리를 성숙한 인간으로 이끕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에요. 그리스 신화에서 신은 인간이 가진 일회성, 즉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인간을 질투합니다. 인생이 단 한번이기에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귀한 겁니다."
박 수녀는 제주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여름방학 한달간 제주도 무당들을 만나고 제주굿을 연구할 계획이다. "우리나라 사회정의의 시험무대가 된" 강정마을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일정에 포함돼 있다.
박 수녀는 24일 통화에서 "경쟁적이고 위험천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가 가야 할 길은 결국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며 "교회가 가난에 대한 영성,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역할에 한발짝 더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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