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불황의 주범, 과잉생산경제는
어떻게 ‘거버넌스’를 창출·변화시켰는가?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거버넌스’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행정체제의 기원을 찾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적 유행어가 된 이 개념은 언제, 어떻게 발생했을까? 이를 밝힐 수 있다면 거버넌스를 둘러싼 많은 혼란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며, 우리는 한 단계 발전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놀랍게도 그 해답을 ‘과잉생산’이라는 경제 현상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를 통해 과잉생산경제가 지속되는 한 ‘불황’은 반복될 수밖에 없으며, 현재의 전 세계적인 불황 역시 장기적인 과잉생산에서 빚어진 것임을 이야기한다. 요컨대 이 책은 ‘거버넌스’라는 정치·행정 현상의 기원을 찾기 위해 ‘과잉생산’이라는 경제 현상에 주목하고, 이 과정에서 ‘불황’을 재해석하고 있다.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개념들...우선 이 책의 제목을 보자. ‘불황’은 알겠는데, ‘과잉생산경제’는 고개가 좀 꺄우뚱해지고 ‘거버넌스’에 이르면 혼란스러워진다. 이들 용어는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명확히 정의된 것도 아니라서 사용자에 따라 제각각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일쑤이다. 특히 거버넌스 관련 이론의 경우 크게 ‘정책네트워크론’과 ‘신공공관리론’이라는 좌/우파 이론으로 나뉘어 발전해오면서 어느새 ‘뉴 거버넌스’라는 용어까지 등장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 책은 과잉생산경제가 무엇인지, 또 거버넌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연 이 두 가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개념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이러한 혼란에 답하고자 한다. ‘경제’와 ‘정치ㆍ행정’이라는 명확한 경계가 그어져 있는 분야를 하나의 시각으로 가로지르는 동시에, 좌/우 이론을 통합시켜 거버넌스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야말로 ‘도전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잉생산경제, 불황의 원인이자 거버넌스의 기원 거버넌스를 둘러싼 많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대안적 정치ㆍ행정체제로서 거버넌스 이론에 대한 논의는 계속 진전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논의를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념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하나의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선 그 ‘기원’을 밝혀야 함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거버넌스로 규정되는 현상이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가라는 질문은 이 책의 출발점이자 핵심이 된다.
놀랍게도 저자는 거버넌스의 기원을 과잉생산경제에서 찾는다. ‘과잉생산(overproduction)’이란 사전적으로 보면 “소비에 대해 생산 또는 자본설비가 과다한 경제 상황”이나 “생산과 소비 또는 자본설비와 소비 사이에 균형이 깨진 상태”를 가리킨다. 현대사회에서 이 과잉생산은 다양한 경제적 문제들과 연결돼 있다. 과잉생산으로 인한 수익률 하락을 보전할 목적으로 기업들은 생산시설을 해외의 저임금 지역으로 이전한다. 또 생산 이외의 부문, 즉 금융 부문에서 수익을 올리려 한다. 투기적 자본이 활개를 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업이나 재정적자 역시 과잉생산으로 어려워진 경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볼 때 불황의 원인도 과잉생산에서 찾을 수 있다. 불황기가 되면 급속하게 언론을 타며 마치 불황의 결과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과잉생산이 사실은 불황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1970년대에 시작된 과잉생산경제가 무려 4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으며, 이를 유지하려는 잘못된 정책이 ‘거품’을, 그리고 이 거품의 붕괴가 지금의 불황을 낳았음을 말한다.
거버넌스, 과잉생산에 대한 정부조직의 대응 양식 이러한 과잉생산경제 상황에서 정부의 환경은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정부 부문에 경쟁이 도입되고 심화됐다. 또한 시민이 ‘고객’으로 바뀌었으며, 그에 따라 정부의 힘은 약화되었다. ‘고객화된 시민’은 더 이상 정부의 일방적인 지배권력 사용을 용인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잉생산경제가 가져온 환경변화에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왔는가? 저자는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정부는 ‘고객지향행정’으로 이념을 바꿨다. 예컨대, 시민을 민간기업의 ‘고객’처럼 섬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둘째, 고객지향행정의 이념을 실행하기 위해 조직을 혁신했다. 규모를 줄이고, 권한을 이양하고, 성과를 중시하고, 인센티브를 도입하고, 조직을 수평구조로 바꾸는 등 최근 3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정부 혁신은 한마디로 ‘탈관료주의’로 집약된다. 셋째, 그럼에도 관료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따라서 관료제를 유지하면서 시민의 ‘참여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바로 정책네트워크이다.
이처럼 저자는 거버넌스로 규정되는 현상들을 새롭게 위치시킨다. 기존의 맥락을 따르면, 고객지향행정과 탈관료주의는 신공공관리론으로 대변되는 거버넌스이며, 정책네트워크는 이른바 ‘뉴 거버넌스’로 불려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해석을 따르면, 이들 세 가지는 서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거버넌스의 기원을 과잉생산경제에서 찾고 있는 저자는, 거버넌스란 결국 ‘과잉생산경제에 대한 정부조직의 대응 양식’임을 주장한다. 과잉생산경제는 정부의 환경을 바꾸었고, 정부는 이 환경변화에 대응해 나갔다. 이때의 정부가 행한 대응양식, 즉 조직이념 차원에서의 ‘고객지향행정’, 조직혁신 차원에서의 ‘탈관료주의’, 그리고 조직보완 차원에서의 ‘정책네트워크’. 이들이 바로 과잉생산경제에 대한 ‘대응양식’이며 바로 그것이 ‘거버넌스’라는 것이다.
새로운 논의의 출발이 책은 치밀한 통계자료를 가지고 경제의 흐름을 짚어내는 경제서도 아니고, 앞으로 정부 운영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정책 제안서도 아니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인식 없이 새로운 정치ㆍ행정 체제를 논의하는 것은 섣부른 대안으로 이어지기 쉽다. 또 제대로 된 개념 정의를 공유하지 못한 채 논의를 진행시키는 것도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그러한 점에서 도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이 새로운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 책에서 말하듯, 과잉생산경제가 계속되는 한 불황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숨어 있을 뿐’이다. 또 불황과 그에 따른 사회의 구조조정은 정부의 환경변화를 더욱 빠르게 부추길 것이다. 과잉생산경제와 불황, 그리고 과잉생산경제와 거버넌스의 관계를 재해석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미래 정부와 사회의 새로운 변화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