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이념 논쟁 촉발시킨 최장집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
·"진보적 자유주의 논란 딛고 넘어가지 않으면 정당정치 발전할 수 없어"
오랜만에 벌어진 이념 논쟁이다. 언제부턴가 정치권에서는 이념을 말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이념의 자리를 '상식' '합리' '균형' '통합'과 같은 도덕적인 말들이 대신했다. 이념은 갈등을 유발하고, 소모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돼 왔다.
이념 논쟁을 촉발시킨 이는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최장집 이사장이다. 최 이사장은 6월 19일 열린 정책네트워크 '내일' 창립기념 심포지엄에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치 공간 탐색'을 주제로 발표했다. '
안철수 신당'이 가지는 이념적 정체성으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제시한 셈이다. 정치권에서는 곧이어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의, 내용, 연원, 좌표를 묻고 따지는 논쟁이 이어졌다.
최 이사장은 "골치 아픈 문제가 되나보다라고 예상은 했다"면서 한국 정당정치의 '모호함'을 비판했다. 그는 "정당들이 자신의 이념적 지표나 가치, 지향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당정치를 향상시키는 출발점"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의 윤리라고 말했다.
6월 20일 '진보적 자유주의' 논란의 한가운데 서 있는 최장집 이사장을 만났다.
'진보적 자유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정당은 너무 무이념적이었고 그래서 늘 모호했다. 한국 정당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모호함이다. 이는 정당으로 하여금 책임정치를 회피하게 한다. 정당들은 할 수 있는 한 분명한 자기의 이념적 지표나 가치, 지향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 정당정치를 향상시키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논쟁인가.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말을 쓰자마자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와서 골치아픈 문제가 되나보다 예상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은 딛고 넘어가지 않으면 정당정치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이 가져온 효과가 한국 정당을 무이념적이고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정당이 자기를 정의하는 것을 회피하다보니 정당이 무엇을 하는지 방향이 불분명하다. 뭐가 진보이고 뭐가 보수인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뭐가 다른지에 대해서 말을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자기가 뭘 하려고 하는지 분명히 얘기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를 하는 사람의 윤리다. 욕을 먹든 말든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그 말의 내용을 정책을 통해서 채워나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
경제민주화'라는 사회적 요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당정치가 하나의 전환기를 맞았다고 본다. 이 문제를 접근하고 다루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명료하고 정교한 정치적 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 또한 그 개념이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자유주의'도 포괄적 개념이고 '진보' 또한 어떤 관점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모호하지 않다. 한때는 자유주의가 자유시장경제 원리와 동일시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안에 사민주의적 요소도 담을 수 있고, 신자유주의적 요소도 담을 수 있다. 자유주의가 여러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어서 '진보적'이라는 한정어를 붙인 것이다. 여기서 '진보적'이라는 말은 신자유주의가 낳은 사회경제적 문제, 시장 과잉의 문제에 있어서 좀 더 진보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념이라는 것이 완전하게 딱 정리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넓은 범위에서 가치와 지향을 말하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물론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내용을 채워나가고 자꾸 논의를 통해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손학규 전 대표, 유시민 전 장관 등도 말했다. 과거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장한 이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첫째, 그때와 사회경제적 상황이 다르다. 손학규 전 대표 등이 진보적 자유주의를 썼을 때는 '제3의 길'이 좋은 대안으로 널리 수용되던 시점이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이 표방했던 사회주의적 노선에 신자유주의를 대폭 수용해서 '제3의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다르다. 1990년대부터 2008년 세계 금융위기까지 신자유주의 극성기를 지났다. 그 결과 양극화와 같은 사회 해체가 일어났다. 내가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해결할 수 있느냐와 관련된다. 두 번째는 국가에 대한 판단이다. 내가 말한 진보적 자유주의는 국가 권력에 대한 제한,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가 핵심이다. 과거에 언급된 진보적 자유주의에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없었고 오히려 국가를 통해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국가 중심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제민주화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적 발전 모델은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통해서 재벌 대기업이 국가와 결합한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감독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구를 통해 해결한다고 보자. 이들은 대기업들의 이해관계와 결합돼 있다. 우리 사회가 단순한 법의 지배만으로는 변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힘의 관계가 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특수 이익들, 부분 이익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들이 결사체를 만들고 조직되고 정치적으로 대표되어야 한다."
기존 정당에서도 직능위원회처럼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결사체가 있다.
"껍데기만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직업·직능적 집단은 힘 있는 사람들이 조직을 대표할 뿐 실제 그 사람들이 사회집단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정당이 제대로 역할한다면 그런 사회집단들이 잘 대표될 수 있도록 자극하고 영향을 미치고 또 그런 힘들을 정당의 기반으로 삼도록 조직기반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 정당에서는 이런 시도가 거의 없었다. 그간 한국정치는 기본적으로 엘리티즘이었다. 정당도 정부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정치엘리트들이 만든다. 밑에서부터 정당이 만들어진 역사가 없다. 새로운 정당이 생긴다면 밑에서부터 만들어진 정당이어야 한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안철수 현상을 담을 수 있을까.
"그렇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운영으로 양극화, 사회 해체가 나타났다. 이게 변하지 않고서는 심각한 위기가 생긴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당이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가 풀어야 할 과제를 풀지 못한 것이 누적이 됐다. 양극화한 정치를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양당제는 경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해결할 능력도 없었다. 획기적인 정치 구조개혁이 있지 않고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들이 가져온 결과가 안철수 현상이다. 안철수 현상의 출발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진보적 자유주의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해 안철수 의원하고도 충분한 교감이 있었나.
"안에서 내부 토론도 있었고 교감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내가 보기에는 안철수 의원의 정치관이나 목적 의식은 형성 단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발표했던 것은 일차적으로 나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것이다. 안 의원이 이것을 어떻게 수용해서 정치적으로 어떻게 구체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도 모른다. 물론 안 의원이 여기에 많이 공감을 하고 있다고 보지만, 학자인 나와 정치인인 안 의원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다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역할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의 큰 테두리 내에서는 그것이 같이 갈 수 있다고 본다."
안 의원 주변에는 '진보적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분들도 있다. 김민전 교수, 홍종호 교수 등은 보수로 불리는 박세일 교수 싱크탱크에도 참여했다.
"물론 다를 수 있다. 그 안에는 나와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여기까지 오는 과정도 다른 분들이 많다. 어떤 방향으로 귀결되느냐는 안 의원이 어떻게 정치적 실천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런 역할을 안에서 해보는 것이다."
심포지엄 발표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는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제기되었던 '민주적 시장경제'의 내용을 채우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1998년에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하면서 시도했던 '민주적 시장경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의 연장선상으로 봐도 되는가.
"민주적 시장경제 및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일성으로 제시했던 상당히 큰 울림을 가졌던 말이다. 하지만 당선과 더불어 몰아닥친 외환위기를 해결하는 데 당시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민주적 시장경제'는 말로 제시된 상태에서 몇 달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 당시 나는 정책기획위원장을 하면서 이런 방향에서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의 방향을 틀 수 있지 않을까 노력을 많이 하기는 했는데, 모든 정부의 힘이 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집중돼 있는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후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왔고, 이후 15년 동안은 신자유주의의 극성기였다. 그동안 한국이 신자유주의를 통해서 경제발전을 계속하게 됐지만, 엄청난 부정적인 결과도 동반했다. 지금은 또 다시 민주주의의 원리를 통해서 경제를 접근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시기라고 본다."
발제문의 '맺는 말'에서 가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이론의 영역이 아니라 적극적 실천의지 내지 주체적 역량으로서 '비르투(virtu·능력)'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향후 비르투의 영역에서도 어떤 역할을 맡으실 계획인가.
"나는 지금 정치권에 발을 디딘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에 들어갔다고 모든 사람이 정치인은 아니다. 나는 정치권에 발을 디뎠음에도 불구하고 정치학자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내 역할은 현실정치를 직접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론을 말하는 사람으로서 좀 더 좋은 선택이나 가능의 공간이 있을 때, 그것을 이론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기존의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정당으로 하여금 경쟁을 자극하고 좋은 경쟁이 될 수 있게끔 자극하는 이론적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를 얼마나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안 의원의 생각이다. 안 의원이 정치를 실천하는 데 있어 좀 더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데에 이를 활용하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 있는 결합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고 (나와 안 의원이) 상당히 분리되어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방향에서 좋은 결합이 되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2년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좋든 싫든 민주당은 주요 정당들 가운데 개혁적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정당"이라고 말했다. 이 생각이 변하게 된 계기는.
"지난 총선과 대선이다. 양대 선거에서 졌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정당이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후퇴하지도 못하고 뭔가 꼼짝달싹 못하는 웅덩이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 적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그래서 안 의원 같은 좋은 정치적 자원이 있으니 이것이 강한 세력으로 결집해서 어떤 형태든 정치세력화를 하면 외부의 충격을 통해서 민주당이 이런 교착상태로부터 좀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경쟁의 환경을 만든다면 이게 정당정치 발전에 굉장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경쟁의 틀이 형성되어서 선의의 경쟁이 되면 이것이 합쳐져도 좋고, 그렇다면 새누리당과의 선거 경쟁에서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다. 지금 상태에서는 5년 후에 야당이 집권할 수 있다는 것도 별로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발제문에서 '강력한 리더십 형성' '소명의식을 갖는 유능한 정치인 집단' 등 리더십을 강조했다. 안철수 의원은 이러한 리더십을 충족시키는 리더인가.
"안 의원의 리더십은 아직 형성 과정에 있다.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족되었다 아니다를 말할 수 없다.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나도 그렇게 되는 데 좀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현재는 그렇게 됐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리더로서의 안철수 의원과 안철수 그룹이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되느냐 안 되느냐는 안 의원의 노력에 따라 결과가 나올 것이다."
< 진행·윤호우 편집장 hou@kyunghyang.com 정리·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