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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의 위선(Keith Windschuttle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3. 6. 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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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의 위선(Keith Windschuttle) 


   노암 촘스키의 위선(Keith Windschuttle)



* 케이쓰 윈드셔틀은 시드니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Macquarie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New South Wales 대학 등 호주의 몇몇 대학에서 역사, 사회 이론, 미디어 관련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Macleay Press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저술로는 [The Killing of History : How Literary Critics and Social Theorists Are Murdering Our Past,] 등 다수가 있다.


이 글은 미국의 월간 시사비평지 「The New Criterion」(2003년 5월호)에 실렸던 케이쓰 윈드셔틀(Keith Windschuttle)의 글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미국의 언어학자 촘스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시중 서점에 촘스키의 거의 모든 저서가 번역되어 나왔고, 그의 책은 인문사회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 목록에 꾸준히 오르내리고 있다. 한 지식인의 저서가 인기를 얻는다는 사실 자체야 문제될 것이 없겠으나 그것이 균형감을 잃은 신드롬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특히 여중생 사망사건과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 한국 사회의 반미감정이 과열되고 있어 그와 같은 우려를 더한다. 촘스키의 발언과 행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 글이 작게는 지식인 촘스키에 대한 독자들의 객관적인 이해를 돕고, 나아가서는 촘스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우리의 일부 지식인들과 사회운동세력이 가진 논리적 오류를 짚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이것은 사실 가장 기본적인 도덕원칙입니다. 조지 부시가 좋아하는 철학자(예수)가 한 말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있는 위선자의 정의는 유명하죠. 위선자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기준에 따른다면,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에 대한 언급이나 논의는 그 자체가 위선입니다.” - 노암 촘스키, 『권력과 테러』, 2003.


노암 촘스키는 뉴욕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합리화시킨 가장 대표적인 미국 지식인이었다. 그는 (9•11 테러의) 희생자가 미국 외교정책의 훨씬 더 과격한 테러에 의해 죽은 제3세계인들의 숫자보다는 적다고 지적한다. 기존 주류 견해에 대한 의도적인 모욕을 담은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암 촘스키의 지지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학생과 좌파지식인들 사이에서 그가 오늘날처럼 인기를 누려본 적도 없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그와의 인터뷰를 담은 두 권의 책이 출판됐는데,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그 중 하나는 ‘권력과 테러’라는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져 예술극장 영화 시장에서 활발한 영업을 하고 있다. 2002년 3월 영화감독 존 전커맨은 촘스키와 함께 버클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갔는데, 방문기간 5일 동안 촘스키는 최소한 5천명 이상의 청중들 앞에서 5번의 정치연설을 했다.


그 사이 많은 저명한 지식인들이 미국의 반테러 전쟁에 반대했고, 온 세계의 진보 신문과 언론계는 촘스키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하였다. 신문기사들은 촘스키를 위대한 지식인으로 묘사했고, 국가의 양심으로 칭송하였다. 영국신문 「가디안」은 맑스, 셰익스피어, 성경과 함께 촘스키는 세계에서 제일 많이 인용되는 책을 쓴 사람들 중 한 명이지만, 그들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했고, 미국 뉴욕타임즈는 그는 살아있는 지식인 중에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그를 칭송하였다.


촘스키는 언어학에서 얻은 그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을 미국 좌파의 대변인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대변자가 아니다. 그의 입장은 지난 40여 년 동안 좌파의 정책 생산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배우들, 록스타들, 그리고 반미주의를 외치는 학생들이 대중매체 앞에 섰을 때, 자주 촘스키의 저서들을 인용하여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곤 한다. 따라서 촘스키의 견해에 대한 연구는 현 시대의 좌파, 특히 학문과 예술 분야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문화예술 조류의 핵심 사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반베트남 전쟁 활동가로 자신의 이름을 올렸던 1960년대 이래로 좌파로서의 명성을 얻어왔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에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을 옹호하면서 그의 호소력은 잠시 힘을 잃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9•11 테러 사건을 이용하였고 그로 인해 과거의 영향력과 업적을 훨씬 능가하는 영향력을 얻었다. 74세인 그는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좌파 지식인들의 최고 원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 급진 좌파와는 전혀 다른 학자이다. 지난 30여 년 간, 신 맑스주의자, 여권 운동가(feminist)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이론은 인문과학 분야에서 좌파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이들 이론의 대부분은 난해했다. 특히 번본들은 그 난해한 정도가 극치에 달했다. 이러한 이론들은 인식론, 윤리철학에서의 상대주의를 급속히 파급시켰다.


이런 좌파들과는 달리 촘스키는 정치 이론 분야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 성과를 갖고 있지 않다. 상대주의자도 아니다. 대신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한 진리 추구를 주장하고 간결하고 보편적인 도덕적 원리를 지지한다. 그리고 그의 글은 전문가들보다는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 있어 글의 논지가 매우 분명하다. 그는 난해한 개념적 글보다는 평이하고 사실적인 근거들을 가지고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최근 지식 사회에 유행하는 개념적 설명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인 근거들을 활용한다.


촘스키는 1960년대 신좌파의 잔존 세력들 중 가장 두드러지는 지식인이다. 촘스키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미주의라는 신좌파 주장들의 요점을 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이 국내외 정책들을 통해 파시즘 국가가 되어 버렸다고 굳게 믿고 있다. 60년대에 그의 가장 유명했던 책 『미국의 힘과 새로운 관료주의』(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에서 촘스키는 미국에게 필요한 것은 ‘나치즘을 극복하는 것(denazification)’이라고 말하고 있다.


촘스키는 60년대의 강대국들 중에서 미국은 가장 비난받아야 할 나라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원리는 사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4년 독재’였으며, 미국의 자유시장경제 이념은 자본가 권력을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의 대외 정책은 확실한 ‘악(惡)’이었다. 당시 그는 ‘어떤 객관적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미국은 세계에서 최고의 침략 세력이며, 평화와 민족자결 그리고 국제적 협력을 위협하는 최악의 존재라고 적고 있다.


촘스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식을 포함하여 몇몇의 공식적인 행사 때 진행된 펜타곤 주위의 인간띠 시위운동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런 행사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끔찍한 건물을 둘러싼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라 묘사하였다.


당시 이런 식의 반미주의는 좌익들에게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좌파들 중에서도 촘스키를 가장 부각시킨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하였다. 하나는 그가 신망 있는 유명한 학자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학생들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반권위주의적 신좌파들과 그의 견해가 일치하였다는 점이다.


당시에 전통적인 좌파 진영은 공산당 지지자들이거나 혹은 스탈린에는 반대하지만 여전히 레닌과 볼셰비즘을 지지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새로운 좌파 학생 운동 진영은 이러한 구좌파 세력들이 러시아혁명과 동유럽 폭압정권을 지지함으로써 그 권위를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촘스키는 학생세대의 일원은 아니었다. 1968년 그는 종신 재직권을 가진 40세의 교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구좌파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학생들과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 대신 그의 무정부주의 또는 소위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은 새로운 좌파들의 전망을 구체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미국의 힘과 새로운 관료주의』라는 책에서 그는 19세기 무정부주의자인 미카일 바쿠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미카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은 칼 맑스의 사회주의는 국가의 권력을 노동자들이 아니라 공산당의 엘리트 간부들에게로만 이양할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의 반볼셰비키즘에도 불구하고, 촘스키는 사회주의 혁명의 지지자로 남았다. 그는 진정한 사회 혁명은 민중을 개조하고, 민중이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민중 스스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선호하는 현실의 정치적 모델은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있었던 스페인 시민전쟁 기간 동안에 바르셀로나에 설립되어 짧은 생을 다했던 무정부적 집단 거주지였다.
60년대의 새로운 학생운동은 이러한 류의 정치사상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즉 60년대 신좌파는 자신들은 공산권의 전체주의에 의해 때 묻지 않은 좀 더 순수한 형태의 좌파 급진주의를 창조해 내었다고 생각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촘스키의 위선


촘스키는 원리적으로는 공산주의에 경멸적인 태도를 표방했지만 현실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혁명적인 정통 공산주의자 그룹을 인정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그룹에는 쿠바의 공산주의 창시자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 모택동 등이 포함되었다. 촘스키는 1967년 12월 뉴욕에서 열렸던 한 포럼에서 중국에서는 참으로 탄복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였다. 중국은 자체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원리에 의해 형성된 노선을 따라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촘스키는 믿었다.


“중국은 새로운 사회를 상징하는 중요한 예로, 이곳에서는 매우 흥미롭고 분명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집단주의에 기초한 집단농장과 국유화 정책의 긍정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중국은 봉건사회에 종말을 고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촘스키가 모택동의 중국이 살기 좋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치켜세우며 모택동에게 지지를 보냈던 시기는, 1958∼1962년 중국의 대기근 이후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아마도 몰랐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0여 년 동안 3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며 최악의 대참사로 기록된 중국 대기근의 원인이 그가 지지를 보냈던 대규모 집단농장이었다는 사실이 외부에는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의 신념처럼 그가 진정 전체주의를 배척하는 무정부주의적 입장이었다면, 이미 실패한 것이 드러난 소련의 교훈을 직시하며 소련의 정책을 동일하게 모방한 중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좀 더 신중한 입장에서 접근했어야 했다. 이미 소련은 흉년과 기근이 심각했던 1930년대 당시 농업정책과 산업생산량을 속이기 위해 통계를 날조했음이 서방 세계에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    


사실, 촘스키는 공산주의 정권이 일상적으로 자국의 국민을 지배하였던 대규모 폭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967년 뉴욕 포럼에서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중국의 지주 대학살과 북베트남의 지주 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요 목표는 이들 폭력, 특히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NLF)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남베트남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평화주의자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나는 당시 상황이 너무 끔찍했다는 사실만으로 쉽게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테러를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매우 난처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비교 비용(comparative cost)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에 대한 윤리적 입장을 갖고자 한다면  - 나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 한다 - 테러를 사용했을 경우와 그렇지 않았을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테러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베트남 농민들이 필리핀의 농민들 상태로 남는 것이었다면, 테러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남아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특성이라 할 수 있었던 폭력의 대혼란을 지지하는 것은 비단 촘스키뿐만이 아니었다. 1960년대 신좌파 대부분은 이런 경향을 띠었다. 그들은 미국을 반대하고 호치민과 베트공을 전설적이고 낭만적인 영웅으로 추앙하였다.


크메르 루즈의 인민 대학살에 대한 촘스키의 위선


1975년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점령하게 되자 촘스키와 신좌파들은 이를 환영하였다. 그리고 프놈펜 시민들의 대규모 추방 사태와 함께 집단 학살에 대한 보도들이 나왔을 때 촘스키는 중국과 베트남의 테러를 옹호했던 것과 비슷한 논리로 캄보디아의 학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캄보디아에서 다소의 폭력이 있었으나 이는 정권의 교체와 사회 혁명이라는 상황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폭력이었다는 논리였다.


정보를 얻는 것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촘스키는 1977년의 한 기사 글에서 전쟁후의 캄보디아는 아마도 수천 명의 이적행위자들이 몇 달 내에 학살되었던 2차 세계대전 말의 자유 프랑스와 비슷할 거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폴포트 정부의 확실한 성공을 위한 최소한의 대가라고 말했다. 촘스키의 주장은 두 권의 책을 인용한 것이었다. 한 권은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가 쓴 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죠지 힐드브랜드(George Hildebrand)가 출판한 책이었다. 두 사람 모두 미국의 좌파 지식인이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캄보디아 혁명가들의 프로그램과 정책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사진들과 함께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폭력 행사, 그리고 이를 극복한 캄보디아 혁명가들의 성공이라는 테마를 주의 있게 기록한 책들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캄보디아에 대해 매우 다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또 다른 두 권의 책이 있었다. 미국인 작가 존 바론(John Barron)과 앤서니 폴(Anthony Paul)이 쓴 『온화한 땅의 대학살』(Murder of a Gentle Land), 그리고 프랑코스 폰차우드의 『캄보디아 종말의 해』(Cambodia Year Zero)는 폴포트 정권의 집단 대량학살을 고발하였다.


촘스키는 1977년 「네이션」(The Nation) 6월호에서 이 두 책과 다른 언론들의 기사를 비판하였다. 그는 이 두 책들은 반공주의 선전에 불과한 작품일 뿐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캄보디아의 사망자 수가 백만 명에서 이백만 명(전체 인구수 7백 80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한 「뉴욕 타임즈」와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의 보도에 대해 사망자 수에 대한 통계가 의심스러우며 캄보디아의 강제 노동수용소 사진들도 조작된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촘스키가 바론과 폴의 책을 무시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두 책들이 리더스 다이제스트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또 월스트리트 저널 일면에 게재되었다는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월 스트리트 저널은 당시 반공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이 두 언론사들은 캄보디아에 갔었지만 어떤 강제적 학살도 목격하지 못했던 다른 언론인들의 의견들은 게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폰차우드의 책은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1965년부터 프놈펜 점령까지 캄보디아에 머물렀던 작가의 경험과 피난민들과의 광범위한 인터뷰, 그리고 캄보디아 라디오의 보도들을 기초로 하여 쓰였고, 더 나아가 자주 촘스키의 글을 실어 왔던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의 한 좌파 작가에 의해 호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전략은 피난민들 증언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폰차우드의 책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촘스키는 폰차우드가 ‘크메르 루즈에 의해 자행된 야만행위에 대한 끔찍한 증언들을 잘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는 ‘증언의 진실성’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난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고, 외부 세력에 대해 무방비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질문자가 무엇을 듣기를 원하는가를 생각하며 증언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난민들의 증언들을 통해 한 사회의 객관적 현실을 판단하려고 할 때는 그 증언들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특히, 서구인들과 태국인들이 인터뷰한 난민들은 캄보디아의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에 캄보디아 혁명가들에 의해 자행된 잔혹상에 대해 과장되게 증언할 동기가 충분히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진지하지 못한 기자들은 종종 이런 점들을 간과한다.”


촘스키는 그의 이런 비판을 1980년, 그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에드워드 헤르만(Edward S. Herman)과의 공동 저서 『대변동 이후』(After the Cataclysm)를 평가하는 데까지 연장하여 전개하였다. 그리고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관한 내용 대부분은 폴포트 정권을 옹호하였던 촘스키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채워졌다. 그 당시, 촘스키는 뭔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캄보디아에서의 잔학한 기록은 사실이고 매우 소름끼치는 일이며, 전쟁은 폭력과 학살, 억압 등을 동반한다는 것에 의혹은 있을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망자의 수가 백만 명을 넘는다는 의견은 무시하였으며,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의 ‘대량학살’의 중지를 위한 군사적 개입 요구에 대해서는 비난하였다.


반면, 촘스키는 폴포트 정권을 옹호했었던 작가들을 칭송하였다. 그는 프놈펜으로부터 국민들을 강제 추방한 것은 1976년 쌀 생산량의 극감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폴포트 옹호 작가들의 분석을 전적으로 인용하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 그리고 폴포트 정권의 분명한 학살 이후 폭넓게 비난 받았던 프놈펜 철수는 사실 많은 인명을 구한 것이라고 촘스키는 서술하고 있다. 또한 촘스키는 크메르 루즈의 대량학살 책임을 부인하였다.


“캄보디아인의 죽음은 정부의 계획적인 학살과 의도된 아사의 결과가 아니었으며, 농민들의 복수극,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훈련 받지 못한 군대들의 만행이다. 또 굶주림과 질병은 미국의 전쟁과 같은 요인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또한 『대변동 이후』는 난민들의 증언을 폭넓게 비판하였다. 촘스키는 그 책에서 1977년 저술의 자료 출처는 벤 키르난(Ben Kiernan)이라고 밝혔다. 벤 키르난은 당시 호주 대학원생으로 폴포트 정권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모택동주의 잡지였던 「Melbourne Journal of Politics」에 글을 기고했었다. 그러나 촘스키가 그의 독자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변동 이후』가 출판되던 해인 1980년 이전부터 잘 알려진 것이었다. 바로 벤 키르난 자신이, 자신의 주장을 이미 철회하였다는 것이다.  


키르난은 1978에서 1979년 사이, 태국의 난민촌에서 5백 명의 캄보디아 난민들과 인터뷰를 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 캄보디아 난민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며 키르난을 설득하였다. 그는 친베트남 성향 캄보디아 정부의 집권 후 당시 크메르 루즈의 학살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역자주, 캄보디아에서는 70년 론놀의 우익 쿠데타로 친서방정권이 수립되자 크메르 루즈는 시아누크와 연합하여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저항을 계속하여 75년 4월 론놀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 과정에서 주류 폴포트파와 반주류 헹삼린파의 대립이 처음 표출되었으며 76년 폴포트파는 시아누크를 제거하고 키우삼판을 국가원수로 한 친중국 경향의 민주캄보디아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정부는 급진적 사회주의 개혁 과정에서 반체제인사, 지식인 등 110∼150만 명을 학살하여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그 뒤 79년 1월 베트남 지원을 받은 헹삼린파가 친소 친베트남의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크메르 루즈는 타이 국경지대로 분산되어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 증거들은 1979년 ‘Concerned Asian Scholars’의 기관지에 ‘나의 실수’라는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이 잡지는 촘스키가 자주 이용했던 좌파 잡지였으며, 키르난이 ‘폴포트가 지도한 혁명운동의 광신적 애국주의는 국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들 폭력의 명확한 증거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변동 이후』에서 촘스키는 여전히 이런 사실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키르난은 후에 폴포트 정권에 관한 집필을 하기 위해 캄보디아를 방문하였다. 1975∼1979년 사이 크메르 루즈 정권 하의 사회상, 권력, 대량학살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이 책(The Pot Pot Regime: Race, Power and Genocide under the Khmer Rouge 1975∼1979)은 현재, 기록된 역사 중 가장 악랄했던 사건 중 하나를 분석한 결정판으로 간주되고 있다. 1975년 프놈펜의 강제 추방 과정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공무원들, 선생님들,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과 같은 중간계층 대부분이 이유 없는 목표가 되었고, 살해당했다. 최소 68,000에서 최고 70,000의 스님들이 처형되었으며, 도시에 살고 있던 50%의 중국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키르난은 1975년 4월부터 크메르 루즈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베트남의 침공이 있었던 1979년 1월 사이의 총 사망자 수가 전체 인구 789만 명 중 167만 명, 즉 전체 인구의 21%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대사 아니 인류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정권이 자국민에게 저지른 최대의 대량학살이다.


촘스키는 크메르 루즈 정권의 최고 명망성 있고 끈질긴 대변인이었다. 진실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1988년, 촘스키와 헤르만은 그들의 공동저서 『Manufacturing Consent』를 통해 폴포트가 자국민을 대량학살 했음을 시인할 때마저도, 이들은 그 대량학살을 최초로 보도했던 언론인들과 작가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옳은 것이었다고 고집하였다. 1979년 베트남의 크메르 루즈 축출 이후 드러난 증거들은 1977년 이들이 혹평하였던 보고서들을 정당화시켜주지 않는다고 또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 주장의 시작이자 전부였던 ‘비난받아야 할 주 대상은 미국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완강히 버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촘스키는 여전히 캄보디아에 대해 저지른 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수단 폭격 사태에 대한 촘스키의 근거 조작


촘스키는 오늘날까지 이런 일정한 행동 패턴을 고집해 오고 있다. 9•11 테러에 대해서도 그는 보다 사악한 미국의 행동에 맞서 테러리스트들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폴포트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똑같은 방식의 의도적으로 선별된, 또 도덕적으로 이중적 잣대를 가진 증거들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2001년 9월 12일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은 매우 잔학한 행위이다. 그러나 그 규모에 있어서는 그 테러리스트의 공격은 가령 클린턴의 수단 폭격에 필적하지 못한다. 클린턴은 별 근거도 없이 수단을 폭격하였으며 그 결과 수단의 약품 공급 절반을 파괴하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여기서 수단 사건이란 사담 후세인 정권의 지시에 의해 화학무기 제조 연구를 하고 있다고 의심되던 VX연구소가 위치한 카톰(Khartoum)의 알쉬파 제약공장을 미국이 미사일로 공격한 사건을 말한다. 근로자들이 자리를 비운 밤에 공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고한 인명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다. 그 화학공장은 산업기지 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피해자는 오직 당직자들뿐이었다.


차원이 전혀 다른 이 두 사건을 비교해 가며 비판했던 촘스키의 주장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설득력을 얻어 갔다. 그는 salon.com의 한 기자에게 수단의 독일 대사관과 Human Rights Watch의 발표를 인용해 9•11 테러로 뉴욕과 워싱턴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파악조차도 안 된 카톰의 수단인 사망자보다 적은 수이며, 단 한 개의 폭탄이 수만 명의 죽음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즉각 그 근거를 상실했다. 그가 비판의 근거로 이용한 출처지의 하나인 Human Rights Watch는 바로 다음주 발행된 salon.com에 촘스키가 근거로 한 어떤 자료도 제공한 사실이 없음을 밝혔다. Human Rights Watch의 홍보 이사는 사실 Human Rights Watch는 수단에서 있었던 미국의 폭탄 공격에 따른 시민 사망자 조사를 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사실에 대한 주의 깊은 조사 없이는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촘스키의 두 번째 인용 근거인 독일 대사관도 그 폭탄 투하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또한 1996년부터 2000년에 수단 주재 독일 대사로 있었던 워너 다움(Werner Daum)은 2001년 여름 「Harvard International Review」에 독일 대사관은 그 사건에 대해서는 조사한 적이 없다고 적고 있다. 그가 비록 외교관이기는 하지만 그의 글은 단지 외교적 수사에 그친 글이 아니었다.


그의 글은 주로 미국의 국제 인권탄압의 전과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 미국의 책임이 있으며, 미국은 또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족을 독가스로 살해한 것에 침묵했으며, 미국은 1991년 이후 경제 제재로 인한 600,000 이라크 어린이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톰 폭격에 의한 총 사망자의 수에 대한 그의 언급은 촘스키가 말한 것처럼 단정적이지 않다.


“알시파 공장의 파괴로 이 불쌍한 아프리카 국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합리적으로 추정을 한다면 수만 명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WHO의 자료에 의하면 이 공장은 수단 시장의 20∼60%에 달하는 몇 가지 기초 의약품과, 100%의 정맥 주사액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수입을 통해 이 생산품들이 대체 공급되기까지는 세 달 이상이 걸렸다.”


그러나 다움이 말한 합리적인 추정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고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공장의 파괴로 인해 수입으로 생산량을 대체하는 데에는 세 달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정말 약품들을 선적하고 수입하는 데 이처럼 긴 시간이 걸린다고 납득하기는 어렵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수만 명의 사람이 그 짧은 시간에 죽었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설령 그렇게 수만 명이 죽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이유는, 아마도 SARS와 같은 전염병의 발발과 확산이라는 명백한 보건상의 위기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누구도 그러한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들은 사람은 없다.


수 년 동안 수단에 의료지원 사업을 해왔던 Oxfam,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s), Norwegian People’s Aid와 같은 서방 세계의 어떤 지원 단체들도 당시 사망자 수의 특이한 증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대신 그 당시나 지금이나 수단의 가장 심각한 의료 문제는 카톰의 무슬림 맑스주의 정부가 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수단 남부의 기독교 시민병원을 폭격하는 내전 상황에서 초래되고 있다.


때문에 약품의 부족 때문에 3개월 동안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기 어렵다. 수단에서 활동하는 어떤 의료지원 단체도 모르는 이런 상황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따라서 9월 11일 테러공격에 대한 촘스키의 정당성 부여는 폴포트와 그의 캄보디아 대량학살에 대하여 자신의 변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사기이다.


신지식 관료 계급에 대한 촘스키의 이중성


1967년 2월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의 명사 코너에서 그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거짓을 폭로하는 것은 학자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는 매우 적절하고 기억할 만한 성명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활동의 근본 목표에 대한 좋은 지적이었다. 촘스키는 그의 성인으로서의 삶 대부분을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들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냈다.


촘스키의 『미국의 힘과 새로운 관료주의』(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란 책의 주 논지는 새로운 류의 학자들에 의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소크라테스 식의 자유사상 활동을 추구하지 않고 군-산 복합체 국가의 노예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예 지식관료계급이 바로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바꿔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제국주의 국가 공무원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식민 모국의 박애를 설득하고 제국주의 세계 질서를 옹호한다. 또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의 이해를 그들이 진정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촘스키는 학문 영역 중에서 심리학, 사회학, 구조 분석, 그리고 정치학을 최악의 범죄적 학문으로 지명하였다. 동시에, 하버드의 사무엘 헌팅톤 같은 학자를 최악의 제국주의 옹호자라고 거명을 하였다. 촘스키는 또 베트남 전쟁은 위의 신예 관료계급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지식관료계급 같은 새로운 유형의 위험에 대한 촘스키의 인식 그 자체는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고 급진적이지도 않다. 가끔 서방의 국가들과 동유럽 나라 사이에서는 같은 현상에 대해 비슷한 비판이 나오곤 하였다. 이미 1940년대의 촘스키와는 정반대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있는 Friedrich von Hayek의 『노예의 길』(Road to Serfdom)이란 책은 복지 국가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그들을 서구의 자유를 위협하는 내부적 요인들로 간주하였다. 촘스키는 이러한 비판을 단순히 좌파 버전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탈산업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요구되는 기술과 지식을 지배하고, 초강국 미국에 의한 국제사회 경영을 주장하고 있는 현대 사회 지식계급의 이데올로기에는 위험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촘스키는 이런 비판이 그 자신에게도 정확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 자신도 동일하게 신 지식관료로서 사회 이데올로그 역할을 해왔다. 1967년 테러와 집단 학살이 함께 진행되었던 중국과 베트남의 농업집단화와 공산화에 지지를 보냈던 것처럼, 그는 전통적 사회에 대한 중국과 베트남 식 폭력적 재조직화를 지지해왔다. 아시아에서의 혁명에 대한 그의 옹호는 그 자신도 국제사회의 재구성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그는 극좌파로서 유혈 학살을 옹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촘스키 그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신 지식관료계급의 완벽한 전형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신 지식관료계급으로서 전형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배한 이유는 군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군사 전문가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 그 전쟁을 포기한 것은 바로 미국 국내의 정치적 여론 때문이었다. 촘스키와 같은 급진적 좌파들이 1960년대 당시 학생 세대를 반전 운동에 참여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의 정치비용은 급상승했던 것이다.


그러나 촘스키와 같은 이들이 선택했던 친 베트남 공산당 정책은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그들이 비난하는 1960년대 행동주의 과학에서 파생된 자본주의의 관료적 정책 대안보다 훨씬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필리핀의 개인 소유 농업 제도와 베트남에서 소위 혁명적 폭력에 의한 해결 방식을 비교해보면 베트남에서 얼마나 더 큰 희생이 따랐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필리핀의 경우, 2001년 국민 일인당 평균 GDP는 4,000달러였다. 같은 시기, 혁명 25년이 지난 후 베트남의 생산량은 필리핀의 절반 정도 수준의 2,100달러였다. 혁명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던 베트남인들조차도 이러한 처참한 결과 앞에서 낙담하고 있다. 1999년, 베트공의 장군이었던 팜시앙 안(Pham Xuan An)은 “이삼십 년 전 해방에 대해 이야기했던 모든 것, 모든 계획들, 모든 조직들이 지금의 몰락한 나라를 낳았다. 아주 잔인하고 가부장적인 어설픈 이론가들이 이 나라를 망치고 만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 어설픈 이론가들이야 말로 촘스키와 그의 지지자들이 계승하고자 했으며 확산시키려고 했던 바로 그 신 지식관료계급이었던 것이다.


촘스키의  미디어 이론 오류


사회 과학자들이나 관료들뿐만 아니라 촘스키가 오랫동안 적대했던 다른 지식인들 그룹이 있는데 언론, 방송 등 바로 매스 미디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의 정치 활동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촘스키는 정치 이론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공헌을 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그의 정치 관련 책들은 짧은 에세이, 인터뷰, 연설, 신문 칼럼들의 모음집이다. 그나마 이런 책들에 비해 비교적 이론적으로 면밀한 분석을 시도했던 작품이 있는데 1988년 Edward S. Herman과 공동 저술한 『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여론 조작: 대중매체의 정치경제)이다. 그러나 결국 이 책도 그의 추종자들에게 실망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미디어 매체 연구에 대한 영역은 민주주의의 네 번째 권력이라고 부르는 뉴스 미디어의 전통적인 방어 이론에서부터 좌파 성향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 의해 생산된 가장 난해한 문화적 분석에 이르기까지 아주 방대하다. 그러나 촘스키와 허르만은 이러한 미디어 매체 이론의 어떤 부분도 제대로 소화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대신 그들의 책은 1930년대의 낡은 맑스주의 팸플릿에 나와 있었을 법한 미숙한 분석을 제공한다. 서문 이외에 이 책의 대부분은 과거 그들이 중앙아메리카(엘살바도르, 과테말라, 그리고 니카라과)와 동남아시아(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사건들에 대한 비평을 재탕한 것이다. 이에 1981년의 KGB-불가리아 사이의 교황 암살음모에 관한 보고서를 한 장으로 추가했다.


대중매체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하여, 촘스키와 허르만은 그들만의 ‘세뇌 모델(Propaganda Model)’을 제시한다. 이 세뇌 모델이란:


“미디어의 기능은 즐거움, 오락, 정보 등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들이 기존 사회제도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치관과 믿음, 행동 양식 등을 교육하는 것이다. 집중된 부와 계급적 대립의 사회에서 대중매체가 이러한 역할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선전이 필요하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디어가 자유민주주의 혹은 전체주의 중 어떤 사회에서 운영되든지 상관없이 미디어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한다. 오직 차이점이 있다면 공산주의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미디어가 권력을 장악한 엘리트들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미디어는 활발히 경쟁하고, 정기적으로 기업이나 정부의 부정행위들을 적발, 공격하며,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견과 사회적 관심을 위한 대변자로 자신을 치장하면서 자신의 본질적 역할은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촘스키와 허르만은 정부에 대한 미디어들의 공격은 항상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표현의 자유란 권리는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특권층의 경제, 정치적 목표를 설득하기 위한 연막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미디어는 모두 대기업에 의해 운영된다. 이들은 주요하게 국내 광고에 그들의 수입을 의존하며, 대부분의 뉴스는 다국적 뉴스 기관에 의해 제작된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는 각종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친자본주의적 기관들로부터 편지, 탄원서, 소송 등으로 집중 포화를 맞는다.


그러나 그들은 두 가지 문제를 명백히 간과하고 있다. 하나는 저널리스트들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미디어 청취자들의 선호도 문제이다. 촘스키의 책에는 저널리스트들과 다른 뉴스 프로듀서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언론의 자유를 행사하고 있다고 믿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촘스키와 허르만은 이들 저널리스트들과 프로듀서들이 친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면서 그 동안 속아왔다고 쉽게 재단한다.


또한 이 두 작가는 왜 수 백만 명이나 되는 보통의 사람들이 매일매일 신문을 사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등 일상적인 선택을 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어떤 분석도 시도하지 않는다. 촘스키와 허르만은 독자들과 시청자들이 왜 자본주의 미디어 소유주들의 세계관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미디어 청취자들의 선호도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이런 촘스키와 허르만의 미디어 관점, 즉 저널리스트이든 독자이든 아주 쉽게 자본주의 사회의 강자의 이데올로기에 속아 넘어간다고 하는 관점은 단지 촘스키와 허르만이 만들어낸 허구적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이러한 관점은 자신의 정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거만하고 오만한 경멸적인 촘스키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경멸적 태도는 1989년에 있었던 한 회의에서 촘스키와 질문자들 사이에서 오갔던 문답에서도 드러났다.(이때의 내용은 2002년 촘스키의 ‘권력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Power)’에서 다음과 같이 재정리되었다).

“남자: 제가 본 유일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저널리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중도좌파’라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촘스키: 보십시오, ‘중도좌파’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은 그들은 전통적인 자유주의자(liberals)라는 뜻이며, 전통적인 자유주의자들은 매우 국가중심주의적이고 일반적으로 권력 쟁취에 힘을 집중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촘스키는 그와 동일한 급진적 좌파 관점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모든 사람을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로 만드는 환상을 깨트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현 사회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을 수 있다고 믿었다.


촘스키의 이중 윤리 기준

유럽의 계몽운동 이후, 수많은 유명한 지식인은 자신들을 어둡고 타락한 세상에서 한 줄기 등댓불 같은 예수와 같은 존재로 부각시켰다. 이것은 학생들과 젊은 이상주의자들을 그들의 추종자로 돌려세우는 전략이기도 하였다.

이 전략은 지지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윤리 명제가 수반될 때 가장 성공적인 것이었다. 9•11에 대한 그의 반추에서, 촘스키는 외관상으로는 그 자신의 직접적이고 명료한 도덕적 원리를 되풀이 하였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대한 반격은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즉 만약 어떤 공격이 우리에게 정당한 것이라면,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정당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인의 책임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거짓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그의 지론에 비추어볼 때 불행히도 촘스키는 그가 스스로 설정한 위의 기준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가장 도발적인 최근의 주장은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전범으로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그들의 적들에게 적용시키는 기준을 자신들에게 똑같이 적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일본의 지도자들을 전범으로 처벌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일본에 떨어뜨렸던 핵무기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촘스키는 또한 한국전쟁 중 미국이 댐을 폭격한 것은 광신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행위처럼 엄청난 전쟁 범죄였지만 미국 내에서는 이를 칭송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가벼운 죄질의 독일의 전범 지도자들을 사형 집행하고 난 지 불과 몇 년 후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주장하는 오늘날 최악의 예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진행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사실상 미국과 이스라엘이 공모하고 있는 것들로서 불법이며, 전쟁범죄이다. 때문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야 한다.”


하지만 촘스키의 도덕적 관점은 완전히 한쪽으로만 편향되어 있다. 그가 지지했던 중국, 베트남 그리고 캄보디아와 같은 공산주의 나라에서 정권에 의한 범죄가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는 촘스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는 한 번도 이들 나라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수년간 몇 가지 선별적이고, 기만적이며 심지어 조작을 통해 이들 정권들을 옹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사실, 만약 폴포트가 체포되어 서구의 재판소에 회부 되었더라면 촘스키의 저작들은 폴포트를 변호하기 위한 증언들로 인용되었을 것이다. 만약 오사마 빈 라덴이 재판에 회부된다고 하더라도 촘스키의 최근의 저술의 한 내용 -“노상 범죄건 전쟁이건 간에 범죄는 일어날 것이고, 대개 이런 범죄의 뒤에는 정당한 요소들이 있다.”- 은 오사마 빈 라덴의 정상 참작을 위한 변호 증언으로 사용될 것이다.


이 윤리적 이중 기준은 미국이 이끌고 있는 반후세인 전쟁을 반대하는 좌파 주도의 세계적 반미 운동에도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 좌파는 사담 후세인에 의해 가장 끔찍하게 자행되었던 국가적 반인민적 테러행위에 대해서는 기꺼이 묵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국익과 이라크 국민들의 해방을 위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개입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다.


이 노(老) 활동가의 긴 정치사는 같은 종류의 사건에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그의 전 인생 경력의 특성임을 증명한다.
촘스키는 자신이 자유주의자이며 무정부주의자라고 표명하여 왔지만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와 살인 정권들을 옹호하여 왔다. 그의 정치철학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들에게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는 그 민중들을 특혜와 권력에 속기 쉬운 무지한 사람들이라 간주하고 이들을 업신여겼다. 그는 지식인의 책임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거짓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으나, 그는 정작 진실을 억압하고 거짓을 행했던 정권을 찬양하고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보편적 윤리 기준을 이야기하였으나 자신이 정치적으로 선호하는 나라들의 정치적 범죄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오직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만 엄격한 윤리 기준을 적용하려고 한다. 그는 신 지식관료계급을 비난하였지만 그 또한 그런 신 지식관료에 불과하다. 캄보디아나 수단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오판을 사후에 인지하고서도, 그는 결코 그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오늘날, 촘스키의 위선은 그가 수없이 선전하려고 했던 좌파가 얼마나 심각한 위선의 경지에 도달했는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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