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중-일 영토 전쟁 제물 된 오키나와의 슬픔

이런저런 이야기/다양한 세상이야기

by 소나무맨 2013. 6. 5. 22:58

본문

 

중-일 영토 전쟁 제물 된 오키나와의 슬픔

시사저널 | 모종혁│중국 전문 자유기고가 | 입력 2013.06.05 14:45

"오키나와의 전신인 류큐(琉球) 왕국은 명(明)·청(淸) 왕조의 번속국이었다. 1879년 류큐를 강제로 병탄한 일본의 행위는 불법적 강탈이었다. 중국과 일본 간 미해결 현안으로 남은 류큐 문제를 재논의해야 한다." (중국 인민일보)

최근 중국에서는 오키나와 귀속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시작은 5월8일 인민일보에 실린 사설이었다. 5월14일에는 중국 군부 내의 강경파 장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뤄위안 소장은 반(半)관영 통신사인 중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키나와는 중국의 일부분이지 일본의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전략문화촉진회 비서장이기도 한 뤄 소장은 인민해방군의 대표적인 이론가다.

중국 대륙에서 이런 논의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과 때를 같이해 5월15일 오키나와에서는 독립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가 결성됐다. 일부 정치인, 대학교수, 사회운동가 등이 조직한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가 그것이다. 이 학회는 주민투표를 통해 과반수 찬성을 얻어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의 주장이 잇따르고 있는 미묘한 시점에서 나온 움직임이다. 중국은 왜 갑자기 일본 땅인 오키나와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4월6일 오노데라 야쓰노리 방위상의 오키나와 미군기지 방문에 맞춰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기지 이전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있다. ⓒ EPA 연합

류큐 왕국, 중·일 사이에서 중립국 지향

오키나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라진 왕국 류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인 규슈(九州)와 타이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군도다. 크고 작은 160여 개 섬으로 구성돼 있는데,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9개다. 각 섬에는 각기 다른 씨족 사회가 형성되어 오랫동안 통일된 국가가 없었다. 12세기부터 세력을 모으기 시작한 몇 개의 부족 집단이 서로 다투다가 1429년 통일 왕국이 성립됐는데, 이것이 류큐 왕국이다.

류큐는 오키나와 중심 섬인 나하(那覇) 동부의 슈리(首里)에 도읍을 정해 기초를 다졌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했는데, 수시로 조공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았다. 16세기 류큐는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일본에게 류큐는 눈엣가시였다. 1609년 명나라가 쇠락한 틈을 타 사쓰마(薩摩) 번이 류큐를 침공했다.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백전노장의 조총 부대를 작은 섬나라 류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사쓰마 번과 에도(江戶) 막부의 신하를 자처하고 조공을 바치는 선에서 독립을 유지했다. 청나라가 들어서고 서구 열강의 일본 진출이 잦아지자 류큐는 다시 과거의 영화를 되찾았다. 청과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쳐도 왕국은 부유했고, 주민 생활은 넉넉했다. 그러나 류큐는 오늘날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을 지향해 제대로 된 군대를 두지 않았다.

이런 안이한 국방 정책은 스스로의 패망을 재촉했다. 1879년 일본 메이지 정권은 단 500명의 병력을 보내 류큐를 점령하고 류큐 왕을 폐위시켰다.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해상왕국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이후 일본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해 자국 영토로 삼았다. 당시 청나라는 일본의 류큐 병탄을 항의했지만 이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청 스스로 서구 열강의 침략을 버텨내기 버거웠던 탓이다. 일본인이 된 오키나와 주민들도 큰 불만을 표출하진 않았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국력이 욱일승천하면서 일본의 신민이 된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2차 세계대전은 오키나와에게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의 본토 진입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 전역을 요새화해 지연작전을 벌이려 했다. 이 때문에 1945년 3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무려 3개월이나 악전고투해야 했다. 전투에 참전할 수 있는 군인 수가 7만여 명에 불과하자, 일본 군부는 만 14세에서 70세까지의 모든 오키나와 주민을 총동원했다.

이런 일본의 만행으로 인한 희생자 20만여 명 중 12만여 명이 무고한 오키나와 주민이었고, 1만여 명은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이었다. 종전 후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1948년 히로히토 일왕은 맥아더 점령군 총사령관에게 오키나와의 일본 영유권만 인정하면 미군이 25년에서 50년, 원하면 그 이상 오키나와를 점령해도 좋다고 제의했다.

중국이 귀속 문제 재논의를 들고 나온 배경에는 이런 오키나와의 고단한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 실제 류큐 왕국은 건국 이래 일본보다는 중국과 가까웠고 400여 년간 줄곧 중국의 번속국임을 자처했다. 인류문화학상 오키나와 주민 대다수가 중국 혈통인 점도 지적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필자와 만난 중·일 관계 평론가 왕진쓰(王錦思) 씨는 "DNA를 분석해보니 오키나와 주민의 선조는 저장(浙江)·푸젠(福建)·광둥(廣東)에서 건너간 중국계"라며 "슈리에 있는 류큐 왕국 건축물은 중국 양식과 똑같고 류큐의 문화 풍습은 일본보다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법학자들은 더욱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왕한링(王翰靈) 중국사회과학원 해양법·해양사무연구센터 주임은 "1946년 맥아더는 일본의 행정구역을 4대 섬 및 북위 30도 이북의 열도로 규정하면서 오키나와를 제외했다"며 "미국 정부도 오키나와를 신탁통치 지역으로 설정해줄 것을 유엔에 요청해 1947년 승인받았는데 이것은 일본의 통치권이 국제법상 박탈됐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정식 확정됐다. 그 후 미국은 오키나와에 대한 지배를 개시했고, 1972년 일본에 되돌려주었다. 왕 주임은 "유엔 헌장에는 신탁통치하 영토 변경과 개정에 대해 반드시 유엔 안보리나 총회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해놓고 있다"며 "미국은 이를 지키지 않고 미·일 간 반환 조약에 따라 돌려줘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일본 정치인들, 오키나와 반감 무시

여기에 중국측은 일부 오키나와인들이 오랫동안 독립을 추구한 점도 주목하고 있다. 1970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류큐독립당을 창당해 완전 독립을 지향했다. 2005년부터 류큐 대학에서 매년 실시하는 여론조사에서는 독립에 대한 지지율이 20~25%를 오르내리고 있다. 스스로를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이라고 여기는 주민도 30~40%나 된다.

이는 반환된 이후 일본의 일방통행식 지배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감이 작용한 결과이다. 일본은 주민들이 반대하는데도 자위대 주둔을 강행했다. 나하의 20%를 차지하는 미군기지는 주민 생활에 큰 불편을 주고 있다. 수시로 일어나는 미군의 강간 사건은 오키나와인들을 분노케 했다. 그러나 미·일 동맹을 중시하는 일본 정치인들은 오키나와의 요구와 불만에 대해 귀를 막고 있다.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각 정당이 선거마다 들고 나왔지만 번번이 공약(空約)에 그쳤다.

중국도 오키나와 영유권을 확보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가 오키나와의 부속 열도임을 주장하자, 그 논거에 대한 반박을 위해 오키나와를 이용할 뿐이다. 결국 오키나와 문제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 선전·선동을 구사하는 국제 정치의 냉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모종혁│중국 전문 자유기고가 /

Copyright ⓒ 시사저널(http://www.sisapres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키나와 사람들은 공범이 되고 싶지 않아요<러브 오키나와> 상영회로 방한한 후지모토 유키히사 · 카케야마 아사코 감독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06.05  16:02:0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화면 속 두 여성이 바닷가에서 체조를 하더니 옆에 있던 작은 카누에 몸을 싣는다. 파도를 헤치는 위험천만한 항해 후에 도착한 곳은 몇 명의 인부들이 일하는 작은 망루. 곧 몸싸움이 벌어지고 여성들의 외침이 들린다.

“하지 말라고요. 작업을 중단하세요!”

인부들이 다리를 잡고 망루에 오르는 이들을 저지하자 목소리가 한층 격해진다.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인부들을 돌려보내세요! 다리 잡지 말라고요. 그게 당신들의 일이에요? 위험해요! 그만둬요! 안 돼요!”

격렬히 저항하는 이들은 8년째 미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오키나와 헤노코 주민들이다. 다큐멘터리 <러브 오키나와>는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주민들의 긴 싸움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상영회를 위해 서울을 방문한 후지모토 유키히사 · 카케야마 아사코 감독을 만났다.

   
▲ 후지모토 유키히사 감독(왼쪽)과 카케야마 아사코 감독 ⓒ문양효숙 기자

후지모토 감독은 오랫동안 미국의 군대와 전쟁에 집중해 왔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홋카이도 야우스베쯔 자위대 기지, 한국 매향리 미군기지, 오키나와 헤노코 신기지를 잇는 현장을 찾아가 군사기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촬영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800일간 미국에 가서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미국 병사들, 참전을 거부한 병사들을 취재했다. 미국 젊은이들이 겪은 전쟁의 실체를 밝히는가 하면 오키나와에 오는 미국 해병대원들이 12주간 받는 훈련의 문제점을 파헤쳐 <미국, 전쟁하는 나라의 사람들>, <미국, 만세>, <one shoot, one kill> 등을 만들었다.

후지모토 감독이 미국의 전쟁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1988년 아프가니스탄이다. 그는 수도 카불에서 총격이 벌어지는 현장에 있었고 노인과 여성,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전쟁의 맨얼굴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전쟁의 참상을 알려 그것을 종식시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후지모토 감독은 미군이 오키나와 기지에서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으로 출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주민들을 만나러 오키나와를 향했다.

평화운동가였던 카케야마 감독이 영화를 찍게 된 것은 훗카이도 야우스베쯔의 한 농민 때문이었다. 바로 자위대 기지 건설에 맞서 죽을 때까지 자기 땅을 지켰던 단 한 명의 농민, 카와세 한지 씨다.

“일본에서 제일 큰 훈련장이거든요. 그 포격 훈련장 한 가운데 카와세 씨의 토지가 있었어요. 키도 작고 부끄러움도 많은 분이었는데 그분이 너무 좋았어요. 거기에서 후지모토 씨를 만났어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당신이 직접 만들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같이 영화를 만들었고 오키나와에도 함께 갔지요.”

아름다운 바닷가와 함께 천혜의 관광휴양지로 알려진 오키나와는 전체 면적의 20%가 미군기지다. 주일미군의 74%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으며, 항공기 소음, 헬리콥터 추락사고, 기지 공해 등의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1995년 미군 3명이 12세 오키나와 소녀를 집단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85,000명이 참가한 현민 대회가 열리고 일본과 미국 정부는 후텐마 기지를 반환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대체기지를 만들겠다고 협약하고 이전할 장소로 헤노코를 지목한다. 이에 헤노코 주민들은 ‘생명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한다. 1997년이었다.

   
▲ 오키나와 주민들의 미군기지 반대 투쟁을 그린 다큐멘터리 <러브 오키나와> (영상 갈무리)

카케야마 감독은 오키나와 주민의 긴 싸움의 힘은 무엇보다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군대가 없던 비무장 섬이었죠. 그런데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주민들도 죽고 오키나와 전체는 초토화됐어요. 헤노코 신기지 건설 계획이 발표된 게 1997년이었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싸우는 분들이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시죠. 전쟁을 경험한 분들인 거죠.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에 대한 애정도 깊지만 마음 깊은 곳에 ‘군대는 안 된다’가 자리 잡고 있어요.”

후지모토 감독은 “아름다운 곳은 모두 미군이 점령했다”며 “오키나와현 주민들은 자신의 바다도, 하늘도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여론이 대부분이다. 정당이 어디건 미군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를 표명하지 않으면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없다. 후지모토 감독은 “비록 1%지만 무거운 1%”라고 말했다.

“작년에 후텐마 기지 게이트 3개를 현민 전체가 4일 동안 봉쇄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경찰이 사람들을 떼어낼지언정 체포는 못했어요. 오키나와 전체의 힘이죠. 전체 일본 인구의 1%에 불과하지만 그 1%가 전부 반대하니까, 일본 정부도 일방적으로 신기지 건설을 강행하기 어렵죠. 국가와 현민이 맞서고 있는 상태예요.”

그러나 이런 대대적인 저항에도 미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의 안보체제 방향은 강력하다. 후지모토 감독은 “미국의 전쟁에 협력하는 것이 일본의 국책이다. 자민당이건 민주당이건 정권이 바뀌어도 그 정책에는 변화다 없다”고 말했다.

8년, 긴 시간이다. 이렇게나 오랜 싸움에도 물러서지 않는 거대한 국가의 힘에 좌절한 적은 없는지 궁금했다. 감독에게 물었더니 감독은 인터뷰에 동행한 헤노코 주민 사사키 코분 씨에게 되묻는다. 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해 온 사사키 씨는 환하게 웃으며 “무력감 같은 거 없어요”라고 답한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절망할 틈이 없단다.

“헤노코 매립 허가를 방위성이 오키나와 현청에 제출했어요. 심사하는 과정이지요. 7월에는 선고도 있고, 1월엔 시장선거도 있고, 후텐마 기지 정문 앞에서는 매일 항의를 해야 하고요. 헬기 착륙장 건설도 막아야 해요. 원래 계획은 6개였는데 1개 밖에 안 만들어졌어요. 아, 할 일이 너무 많아요.”

   
▲ 오랜 시간 미국의 전쟁과 군대 문제를 다뤄 온 후지모토 감독은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안보체제가 큰 문제”라고 강조한다. ⓒ문양효숙 기자

헤노코 주민들은 해상 시위를 위해 잠수 훈련을 하는가 하면 “튼튼해야 해”라며 하반신 운동을 한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주민 한 사람은 “긴장의 끈을 놓아도 안 되고, 지치지 않도록 적당히 쉬어주면서 가야 해요”라며 바닷가에서 몸을 풀기도 한다.

<러브 오키나와>의 첫 번째 상영회는 제주 강정마을에서였다. 카케야마 감독은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를 보는 시선과 한국에서 제주 강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비슷하다”고 말했다.

“본토와는 거리감도 있고 역사도 조금 달라요. 기지 문제를 한다면 오키나와만의 문제로 한정 시켜요. 일본 본토에서는 관심이 없어요. 오키나와 기지의 여러 사건사고는 오키나와에서만 보도되고 분노하고 투쟁해요. 하지만 본토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런 보도를 하지 않아요.”

카케야마 감독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말했다. 전투기와 군용헬기의 소음, 성폭행 등 끔찍한 사고를 경험한 피해자이지만 오키나와가 미군이 베트남, 아프가니스칸 등 여러 나라로 출격하는 거점 기지가 되기 때문이다.

<러브 오키나와>에서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한 주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걸 막지 못하면 공범자가 될 것이라는 느낌, 그게 괴로워요. 우리 돈으로 만드는 거니까요. 그래서 막고 싶어요.”

<러브 오키나와>는 전투기의 굉음과 함께 시작한다. 평화로운 후텐마 초등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머리 위로 군용 헬기가 낮게 날아간다. 제주 강정의 미래가 오버랩됐다. 강정마을에서 상영을 시작한 <러브 오키나와>는 군산, 평택, 서울 등을 순회했고, 6일 인천 영화공간주안에서 마지막 상영회를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전쟁땐 총알받이… 평시엔 멸시” 오키나와 분노로 들끓어

기사입력 2013-05-24 03:00:00 기사수정 2013-05-24

  후텐마 기지 이전 갈등 속 독립 목소리 갈수록 힘받아

 

photolink


오키나와(沖繩) 중부 요미탄(讀谷) 촌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지바나 쇼이치(知花昌一·64) 씨. 그는 미군기지 철폐를 주장하며 각종 집회에 참석해왔다. 일장기인 히노마루(日の丸)를 불태워 경찰에 체포된 적도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 독립’을 주장한 적은 없었다. 피를 흘려 투쟁해야 독립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건 무리라고 봤기 때문이다.

비가 오던 21일 지바나 씨의 집을 방문한 기자에게 그는 “올해부터 스스로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이 어떤 주장을 해도 중앙정부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정부에 항의하는 최후 수단이 바로 독립”이라고 말했다.

최근 오키나와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부쩍 늘었다.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모임과 단체도 생겼다. 왜 지바나 씨 같은 사람이 늘고 있을까.


○ 잊을 수 없는 분노

22일 오키나와 기노완(宜野灣) 시의 사키마(佐喜眞)미술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그림 앞에 관람객들의 발길이 멈췄다. 가로 8.5m, 세로 4m 크기의 오키나와전도(戰圖).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땅에서는 유일하게 지상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 전쟁을 그린 것이다.

가장 섬뜩한 장면은 언니와 여동생이 상대방 목에 매단 줄을 당겨 서로 죽이는 것이다. 바로 옆에는 형이 동생의 가슴에 죽창을 찌르는 장면도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 자살을 묘사한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출판된 ‘고등학교 류큐·오키나와사’를 보면 1000명 가까운 주민이 “집단 자결하라”는 군부의 명령을 받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군은 수류탄을 나눠줬다. 가족끼리 원을 그리고 모여 수류탄을 터뜨렸다. 간혹 불발도 있었다. 그 경우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당시 미군에 붙잡히면 잔혹 행위를 당한다는 유언비어가 만연했다. 가족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는 게 마지막 애정 표현이었다. 섬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2만 명이 오키나와 전쟁에서 사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 군부가 미군의 본토 공격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에서 총력전을 벌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또 민간인에게 집단 자결을 명령한 일본군은 미군에 투항해 살아있는 모습을 봤다. 그때부터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에 대해 지울 수 없는 적개심을 가지게 됐다.

오키나와 제1의 도시인 나하(那覇) 시내의 해군사령부 지하 터널에는 오키나와 전쟁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옛 류큐 왕국의 왕이 살던 슈리 성 아래에는 군부가 피신했던 터널이 아직도 있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과거 일본군의 만행을 떠올린다.


○ 차별과 무시는 아직 현재진행형

“지금 헬기 한 대가 학교 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소음 속에 우리 아이들이 편히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21일 오후 기노완 시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 출입문.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아카미네 가즈노부(赤嶺和伸·59) 씨는 “오스프리(미군 수직이착륙기) 배치 반대, 미군 철수”를 외쳤다. 그는 기자에게 “미군이 주둔하면서 오키나와 주민의 인권은 사라졌다. 범죄를 저지른 미군이 부대로 도망가면 경찰이 제대로 처벌할 수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일본 전체의 미군기지 중 74%(면적 기준)가 오키나와에 몰려 있다 보니 각종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오키나와 현에 따르면 1972년부터 2010년까지 미군의 범죄 건수는 5705건으로 월평균 약 13건이다. 성폭행도 수시로 일어난다. 이 때문에 대형마트에서는 어린이용 ‘방범 부저(벨)’를 판매하고 있다. 주된 구매자는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 여성이다.

미군기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귀머거리’다. 오키나와 주민 약 10만 명이 지난해 말 ‘오스프리 결사반대’를 외치며 데모를 벌였지만 결국 후텐마 기지에 오스프리가 배치됐다. 기노완 시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후텐마 기지를 현 밖으로 이전해 달라는 요청도 수년째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현 북부 나고(名護) 시 헤노코(邊野古)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오타 마사히데(大田昌秀·88) 전 오키나와 지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오키나와 주민들 중에 ‘독립하자’는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지금처럼 강하지는 않았다”며 “만약 일본 정부가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로 이전한다면 사상 최악의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 높아지는 ‘독립 쟁취’ 목소리

최근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로부터 이중, 삼중으로 배신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8일 오키나와가 미군 지배 아래 들어간 굴욕의 날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정부 행사로 ‘주권회복의 날’ 기념식을 열었다. 당시 일왕에 대해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상당수 오키나와 주민은 전쟁 당시의 아픔을 떠올렸다고 한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방문해 “풍속업(매춘업)을 더 활용하라”고 말했던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大阪) 시장의 발언도 자존심을 건드렸다. ‘오키나와 여성들은 매춘업에 종사해도 괜찮다’는 뜻으로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하 시내에서 ‘쓰치(土)’라는 상호의 바를 운영하는 고모 씨(64)는 “차별당하며 살 바에야 독립하는 게 낫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오사카에서 11년 전에 이주해 온 본토인인데도 오키나와 원주민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것이다.

이달 15일 ‘류큐 민족독립종합연구학회’라는 단체도 만들어졌다. 학계가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창립 멤버인 도모치 마사키(友知政樹) 류큐국제대 교수는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직 소수지만 본토로부터의 차별을 느끼는 주민은 늘고 있다”며 “앞으로 다른 단체와 연계해 독립 후 문제들을 논의하면 반드시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오키나와=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재테크 정보

 

관련기사

오키나와 | 전쟁

작가 나카무라 기요시씨 인터뷰 “주민들, 독립후 중국 편입에는 반대”

기사입력 2013-05-24 03:00:00 기사수정 2013-05-24 09:52:01“미군기지 이전 반대 75%가 독립 추진 잠재세력”

오키나와(沖繩)와 관련해 다양한 책을 펴낸 작가 나카무라 기요시(仲村淸司·55·사진) 씨는 20일 “지금까지의 독립 논의와 달리 최근의 주장엔 진심과 절박함이 담겼다”며 “독립 주장은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하(那覇) 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약 2시간 동안 기자와 얘기를 나눈 뒤 “한국 기자가 오키나와 독립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감사한다”며 현지 취재도 기꺼이 동행해 주었다.

―독립을 주장하는 오키나와 주민은 어느 정도 되나.

“류큐대가 1996년 조사했을 때는 3%에 불과했으나 2007년에는 20.6%로 늘었다. 하지만 지난해 1월 류큐신보 조사에서는 다시 4.7%로 내려갔다.”

이 같은 큰 편차가 나는 조사 결과로 오키나와 주민들의 복잡한 심경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비율이 낮은 것 같다.

“독립을 생각하다가도 ‘독립 후 어떻게 먹고살지’를 생각하면 그만 포기해버린다. 제대로 된 독립국을 수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게다가 1972년 미군 통치를 끝내고 일본에 복귀된 후 각종 사회 인프라가 정비된 점을 높이 평가해 독립을 전혀 생각지 않는 주민도 많다.”

―일부 지식인만의 주장에 그치는 것인가.

“아니다. 야마토(일본 본토의 옛 이름)로부터 받는 차별에 대해 폭넓은 공감대가 이뤄져 있다. 오키나와타임스가 최근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의 헤노코(邊野古) 이전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75%가 반대했다. 향후 독립을 주장할 수 있는 잠재적인 주민이다.”

―미군기지 덕분에 먹고사는 사람들은 독립을 반대할 것 같은데….

“오키나와 현이 2009년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의 전체 소득 중 미군 관련 소득은 5.2%에 불과했다. 미군에 의존하는 오키나와 주민은 소수다.”

―최근 중국에서 ‘오키나와 귀속 문제를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피식 웃으며) 일종의 퍼포먼스다. 과거 독립국이었던 류큐왕국이 중국에 조공을 보내며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이유로 중국이 오키나와를 강제로 편입할 수는 없다. 독립을 외치는 오키나와 주민도 ‘독립 후 중국에 편입되자’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키나와=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아라사끼 모리떼루 지음


백영서·이한결 옮김/창비·1만5000원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원래 제목은 '아라사키 모리테루가 말하는 구조적 오키나와 차별'이다.

 아라사키 모리테루(77)는 오키나와 현대사 연구의 선구자요 오키나와 평화운동 진영의 원로다.

아라사키는 일본 도쿄 태생으로 도쿄대에서 오키나와 현대사와 사회학을 전공하고 오키나와로 건너가 오키나와대학 총장까지 지냈다. 오키나와 주민·시민 운동에 참여해 반전지주회를 조직하는 등 미군기지 반대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지금은 평화운동단체 연합체인 오키나와 평화시민연락회 대표간사를 맡고 있다. 한국도 여러 번 방문했다.

그는 이 책에서 오키나와 기지 문제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한다.

"오키나와 군사기지는 동아시아에서 대두하는 중국과 패권의 유지를 꾀하는 미국이 일본과 한국을 종속시키는 형태의 국가간 긴장상태를 낳는 것을 전제로 존재한다.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넘는 민중의 교류와 상호이해를 심화하는 일은 그러한 전제를 부단히 돌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구조적 차별이란 일본 영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주일 미군기지의 75%를 몰아넣음으로써 본토의 부담을 전가하는 식민주의적 정책을 고집하면서 그것을 당연시하는 것을 말한다. 남북 대결이라는 특수성을 깔고 있긴 하지만 주한 미군기지 역시 유사한 조건 속에서 존속되고 있다. 이들 기지는 동아시아의 군사적 도발을 막는 억지력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긴장을 조성하면서 그것 자체를 존재이유로 삼아 다시 긴장을 유발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아라사키는 미군기지 문제 해결을 위해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한국-오키나와 주민 교류와 연대는 미국-일본-오키나와 삼자관계의 틀 안에서만 맴돌던 오키나와 민중운동의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 차원으로 넓혀주었다고 평가한다. 이는 오키나와와 연대를 강화하고 있는 한국의 기지반대운동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아라사키는 영토분쟁의 경우 '국가'와 '영토'에 기반한 영유권이 아니라 역사적·문화적·경제적 생활권으로서의 지역 공존권 구축 쪽으로 발상을 전환해야 문제가 풀릴 것으로 본다.

이처럼 지역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하는 긴요한 창으로서의 오키나와를, 이 책을 번역한 백영서(60) 연세대 교수는 '핵심 현장'이라 부르면서, 분단된 한반도도 또 하나의 핵심 현장이라고 했다.

책에는 아라사키 교수와 백 교수의 대담 녹취록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2006년에 열린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회의'를 계기로 시작된 이들의 교류 자체가 또 하나의 시야 확장일 수 있겠다.

한승동 기자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