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
※ 청대(淸代) 승려 황벽목암(黃檗木庵)의 초서(草書) <매(梅)>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
水寒夜冷魚難覓 留得空船載月歸
(득수반지미족기 현애살수장부아
수한야냉어난멱 유득공선재월귀)
나무를 찾아 가지를 잡음은 그리 기특한 일이 아니니
벼랑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대장부라네
물은 차고 밤은 싸늘한데 고기 찾기 어려우니
빈 배에 달빛 싣고 돌아가네
☞ 야보도천(冶父道川)
- 이 시는 선수행을 하는 납자(衲子)가 타성일편(打成一片)하여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이르렀을 때의 자세를 읊은 것이라 한다. 참선에서 화두(話頭)와 온갖 의심(疑心), 호흡(呼吸)과 번뇌망상(煩惱妄想)까지 모두 화두를 중심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합쳐지는 상태를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화두가 떠나지 않아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수행하는 납자들이 바라는 경계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이르렀다는 표현이 더 이상 적확하게 어울릴 수가 없다.
※ 근현대 중국화가 진반정(陳半丁)의 <철골한향(鐵骨寒香)>
-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는 白凡(김구)이 거사(홍구공원 폭탄투척)를 앞둔 윤봉길 의사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인용했던 구절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백범은 자신이 과거 황해도 안악 치하포 나루터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때려죽일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이 구절을 떠올리며 애써 심사를 가라앉혔다면서 윤 의사를 격려했다 한다.
백범은 치하포에서 만난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誤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감옥에 수감된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백범은 1896년 2월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는다. 이 일은 곧 고종 임금에게 전해졌고 고종은 인천감리 이재정(李在正)을 전화로 불러 사형집행을 면하라고 지시한다. 이 때가 1896년 윤8월 26일, 우리나라에 전화가 개통된 지 3일만의 일이다.
겨우 사형은 면했으나 평생 감옥에서 썩을 판이었다. 바깥의 구출운동도 별무소용. 마침내 백범은 비상수단으로 탈옥을 감행한다. 탈옥 후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이르러 승려가 된다.
여기서 원종(圓宗)이라는 법호까지 받는다. 어디까지나 탈옥이후 몸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房主)를 끝으로 1년여 동안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환속한다.
백범은 1902년 부친상을 치른 뒤 이듬해 예수교에 입교해 구국계몽운동에 나선다. 그가 예수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종교적 신앙보다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상해로 망명하기 전 한때 동학에 입도(入道)해 접주(接主)가 된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곧 실패하고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진사의 집에 피신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해서(海西)지방의 이름높은 선비인 후조(後凋)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학문과 삶의 길을 배우게 된다.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라는 구절도 고능선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백범일지(白凡逸志)≫는 전하고 있다.
※ 근현대 중국 서화가 주창곡(周昌谷)의 <매석도(梅石圖)>
- 지리산 칠불사 운상선원 바깥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에 비슷한 글귀가 씌어져 있다.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의 게송으로 알려져 있다.
塵勞?脫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得樹攀枝未足貴 懸崖撒手丈夫兒
(진로형탈사비상 긴파승두주일장
불시일번한철골 쟁득매화박비향
득수반지미족귀 현애살수장부아)
생사 해탈하는 것이 보통 일 아니니
화두를 단단이 잡고 한바탕 애쓸지어다
한기(寒氣)가 한번 뼈속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짙은 매화 향기를 얻으리
나무를 찾아 가지를 잡음은 그리 귀한 일 아니니
벼랑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대장부라네
※ 근현대 중국화가 유해속(劉海粟)의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番寒徹骨)> (1962年作)
-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9남1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아들 일곱이 외숙(外叔) 장유화상(長遊和尙/일명 寶玉선사)을 따라 출가했다.
장유화상은 허황옥의 오라버니로 황옥이 가락국으로 올 때 그를 수행해온 불교 승려다. 이들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의 지도아래 각고의 수행 끝에 모두 성불하니 지리산 반야봉 남쪽 800m 언저리에 있는 칠불사(七佛寺)다.
수로왕이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이 곳에 큰 가람을 짓고 칠불사(七佛寺)라 이름했다 한다. 이 때가 서기 103년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 372년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비롯한 사절단을 보내 불교를 전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보다 270년 앞서 가락국에 불교가 들어왔고, 칠불사라는 사찰까지 세워졌다 하니 기존의 고구려 전래설(북방전래설)이 무색해지는 형국이다.
칠불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운상선원(雲上禪院)이라는 수행처가 있다. 이곳은 옛 운상원(雲上院)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라 한다.
운상원은 통일신라 때 음악의 명인이었던 옥보고가 거문고를 배우고 새로운 악조(樂調)로 노래를 지은 곳이라는 기록도 있다(≪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운상원 위에 옥부대 또는 옥보대라는 대(臺)가 있다. 장유화상이 일곱 생질(甥姪)을 지도하며 수행하던 곳이라 한다.
장유화상의 속명인 보옥(寶玉)을 거꾸로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름만 봐서는 옥보고와도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서산(西山)·부휴(浮休)·초의(草衣) 등 뭇 선사들이 수행의 자취를 남겼고, 근현대에 와서는 용성(龍城) 효봉(曉峰) 금오(金烏) 서암(西庵) 일타(一陀) 청화(淸華) 등 고승들이 거쳐간 곳이 운상선원이다.
※ 명대(明代) 여류화가 유여시(柳如是)의 <매골수선(梅骨水仙)>
- 당(唐)나라 때 고승 황벽희운(黃檗希雲)선사는 <상당개시송(上堂開示頌)>에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塵勞?脫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不是一番寒澈骨 爭得梅花撲鼻香
(진로형탈사비상 긴파승두주일장
불시일번한철골 쟁득매화박비향)
번뇌를 벗어남은 예삿일 아니니
화두를 굳게 잡고 한바탕 애쓸지어다
차가움이 한번 뼈 속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으리
- 塵勞(진로): ①번뇌(煩惱) ②세속적인 노고(勞苦)
※ 현대 중국화가 관산월(關山月)의 <철골유향(鐵骨幽香)>
懸崖撒手丈夫兒.
【冶父】得樹攀枝未足奇라 (攀枝는 一本에 作攀高라)
懸崖撒手丈夫兒니라 (撒=철이 아니고 살입니다)
水寒夜冷魚難覓하니
留得空船載月歸로다
【야보】(벼랑에서)나무를 잡고 가지에 오르는 것은 족히 기이한 일이 아니로다.
매달린 벼랑에서 손을 놓아버려야 대장부로다.
물은 차고 밤은 냉냉한대 고기는 찾을 수 없어
빈 배에 달빛만 싣고 돌아오도다.
[蛇足] 금강경 正信希有分(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第六
~~若取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며 若取非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니 是故로 不應取法이며 不應取非法이니라
『- - - 만약 ‘法’이라는 相을 취하더라도 我(나)․人(남)․衆生(열등감)․壽者(우월감)에 집착하게 되며, 만약 ‘법이 아니다’ 하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하게 되므로 응당 ‘법’도 취하지 말고 ‘법 아닌’ 것도 취하지 말라.』라는
원문에 중국 송나라시대 冶父道川선사께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한 偈頌이다.
새 정부 들어 각종 요직에 추천된 후보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리를 내려놓았다. 일부는 검증과정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일부는 자진해서 자리를 포기했다. 어떤 이유든 모두가 선망하는 정부 요직에 추천됐다가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된 것은 당사자들의 입장에는 인생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특히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낙마한 인사들의 충격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컸을 것임에 분명하다.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마음을 비우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직접 오랫동안 키워온 조직의 대표직에서 물러나거나 큰 공을 세우고 그 공을 남에게 양보해야 할 때면 누구든 아쉽고 서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공을 이루는 것도 어렵지만 그 공을 내려놓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도덕경(道德經)>의 많은 경구(警句)는 내려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내가 낳았어도 소유하려하지 마라(生而不有)!’ ‘공을 이뤘으면 그 공에 머물지 마라(功成弗居)!’ ‘성공했다면 몸은 물러나라(功遂身退)!’ ‘성공했다고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마라(功成不名)!’ ‘공이 이뤄지고 일이 완수됐다면 백성들이 스스로 했다고 생각하게 하라!(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내가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면 더 위대한 성공을 이루게 된다(不自伐有功)’. 이런 경구들의 한결같은 내용은 결국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내려놓음을 통해 성공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고, 또 다른 위대함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지만 결국에는 더 큰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임원 재계약 시즌이 되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신이 배제되면 회사에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이 먼저 드는 것을 보면 인간은 내려놓는 것보다 놓지 않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거사를 앞둔 윤봉길 의사에게 중국의 선시를 인용해 내려놓음의 결단에 대해 이야기했다.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것이 힘든 일이 아니다!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 벼랑 끝에서 잡은 손을 놓는 것이 진정 장부의 결단이다.’ 송(宋)나라 야보도천(冶父道川)선사의 게송(偈頌)이다. 벼랑 끝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도 힘들지만 때로는 그 나뭇가지를 잡은 손을 놓는 것도 장부의 중요한 결단이라는 것이다. ‘현애살수(懸崖撒水)’, 벼랑(崖)에 매달려(懸) 잡고 있는 손(手)을 놓는다(撒)는 뜻이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손을 놓는 것을 상상해 보면 아찔하다. 손을 놓는 순간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바쳐 자식을 잘 키운 부모들이 내가 그토록 공들여 키운 자식이 섭섭하게 대할 때면 섭섭함을 넘어서 서러움이 북받칠 것이다. 내 젊음을 바쳐 근무한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물러나는 입장에서 보면 아쉬움과 심난함이 클 것이다. 내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면 분노도 일고 가슴은 동요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집착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을 내려놓는 순간 또 다른 자유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는 현애살수(懸崖撒水)의 게송(偈頌)을 통해서 지금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고, 무엇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 내려놓음이 비록 힘든 결정이지만 그 결정의 뒤에는 무한한 자유와 행복이 있음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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