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70년간 한국에 미친 폐해는 경제력 집중만이 아니다. 재벌 중심적 사고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된 점도 지적될 필요가 있다. 학계, 언론, 관료, 사법, 문화 등 각 분야가 재벌의 경제력에 포획되면서 다양한 사고와 담론이 봉쇄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역동성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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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식 연세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61·사진)는 16일 “재벌은 경제력 집중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라면서 “기득권의 인식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논의가 다양성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열풍이 불 때 한국 사회는 무덤덤했다. 피케티 이론의 허점을 공격하는 데 급급했을 뿐 왜 세계가 피케티에 주목하는지에 대해서는 성찰이 부족했다. 신 교수는 “피케티가 뭘 말하려 했고 우리 사회는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자각과 자성이 생겨나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것 없이 넘어갔다”고 말했다.
재벌의 사외이사 제도는 지식인 사회의 입을 막는 강력한 도구가 되고 있다. 1200~1300개가량 되는 대기업 사외이사 자리가 지식인과 퇴직관료들에게 용돈 주는 자리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경제적 이득이 있다보니 재벌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하기 꺼려지게 된 것”이라며 “전문지식이 있고 영향력 있는 이들이 침묵하고 있으니 한국 사회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한국 사회 여론이 치우치는 또 다른 이유는 재벌이 싱크탱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설립한 경제연구소는 재벌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기 힘들다. 민간연구기관도 재벌의 연구용역비를 받는 경우가 많아 비판적 분석을 하기 어렵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국책기관의 입도 닫게 만들었다. 아무리 문제제기를 해도 언론이나 학계가 받아주지 않으니 연구를 꺼리게 된다. KDI의 연구보고서를 검색해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를 다룬 보고서는 2012년 나온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에 관한 해석’이 마지막이다.
신 교수는 “한국이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분명 재벌의 역할이 컸지만 (재벌의) 기득권만 옹호해서는 한국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적극적으로 새로운 아젠다를 내놓고 경쟁과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위기상황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