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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N 전주교통방송 차차차 ,, 전북강과 하천 소개하기 -- 김택천 ,전라북도강살리기추진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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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3.24(금)일자 - 교통방송 67회차 질문지(콘티-진안 죽도)2.hwp


# 교통방송 67회차 질문지 - 3. 24일자[정여립과 죽도]

질문1

- 우리의 삶에 지니며 흐르는 전북의강과 역사문화를 담아드리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전라북도 강 살리기 추진단

김택천 이사장을 모시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

답변1

『오늘은 금강 그 네 번째 이야기로 진안 죽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자연이 살아있는 죽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진안군 진안읍 가막리와 상전면 수동리, 동향면 성산리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죽도(竹島)는 육지 속에 있는 작은 섬이지요.

금강 상류에 위치해 장수에서 흘러내려오는 금강과 무주에서

흘러내려오는 구량천이 이 죽도에서 만나

큰 금강을 만들어 용담댐의 한 줄기가 되는데요,

이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죽도라는 작은 섬이 위치하고 있답니다.

질문2

- 죽도라는 이름이 혹시 대나무 죽자를 써서 죽도인가요?

답변2

죽도는 예전에 쌀을 이는데 사용했던 조리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죽도(조릿대)가 많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기도하고,

산대나무가 많고 천반산이 죽순처럼 솟아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요.

넓은 모래사장과 자갈밭, 유난히 맑고 차가운 물이 바로 죽도의 매력이랍니다.

수려한 풍경 속에 물속이 훤이 들여다 보이는 금강 상류의

맑은 물이 빠르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는

플라이낚시를 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과

"더 리버 와이"가 생각났고, 저만치 멀리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양쪽으로 마주 보고 있는 형태의 모습은

꼭 어느 단단한 철옹성의 입구인 듯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꼭 칼로 자른 듯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깎아지른 듯한 풍경은

마치 중국 무협 영화에서 무술 고수가 양절벽을 날아다니는 장면을

연출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3

-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데요. 가장 멋진 풍경이 펼쳐진 곳은 어디인가요?

답변3

죽도의 여울길이 있습니다.

두어번의 여울을 건너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이 구량천

합류점인데 덕유산 동쪽 골짜기서 발원하여 무주군 안성면과 동향면의

그늘진 계곡을 지나오느라 물이 매우 차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금강본류를 따라 내려가면 본격적인 여울트레킹의 시작이고,

시종일관 발목까지 올라오는 물 속 자갈밭을 걸어가는 이색적인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용담댐 만수일 경우 물의 수위가 높아지고

장마나 집중 호우때는 물의 수위를 가늠하기 어려우니 이 시기를 피해야 합니다.

물속에선 감돌고기(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가 피라미처럼 흔하게 노닐고,

이따금 마주치는 낚시꾼들의 그물에선 팔뚝만한 쏘가리와 꺽지가 잡히기도 합니다.

질문4

죽도에 사연이 많다고 하던데요?

답변4

죽도는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특별한 곳이죠.

선조때 개혁을 외치던 “정여립”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축옥사”를 계기로 아들 옥담과 시비 박연령을 데리고 죽도로 피신하였으나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아들과 시비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합니다.

○ 정여립은 1546년 전주 남문 밖에서 출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25세에 문과에 급제, 관가에 진출하여 서인 이이의 문하에 입문합니다.

늠름하고 통솔력이 뛰어났으며 1570년 과거급제 해

예조좌랑과 홍문관수찬(정6품)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당파싸움과 선조의 무능에 불만이였던

그는 39세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전라도 금구에서 서실을 짓고 동지를 모읍니다.

○ 진안동편 금강 상류 죽도에 아지트를 만들고

천반산에 사람들을 모아 문무를 조련하며 대동계를 조직하는데

대동계는 양반, 상민, 산적, 승려까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정여립은 평소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는가 하는

인민주권설을 역설했고 조선왕조의 근본이념인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론(節義論)을 부정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왕조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고 반왕조 혁명사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였습니다. 정여립의 사상은 후에 모반자로 몰리면서

왜곡된 채 전해졌지만 가히 혁명적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선조때 개혁과 혁명을 외치던 “정여립”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도에서 자결후 기축옥사의 주동자로 몰렸다.

이로인해 선비 1,000여명이 희생당했으며,

전라도 자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그 뒤 호남출신의 중앙 관직의 진출을 어렵게 했습니다다.

이런 영향이 조선조말까지 계속 이어져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 오늘날 정여립의 혁명정신은 전주 혁신도시 도로명에도 정여립의 길로 지었는데

정여립의 사상과 역사를 기리기위해 지어졌다고 합니다.

- 방송 인터뷰 : 전라북도 강살리기 추진단 이사장 김택천

- 자료제공 및 질문지 작성 : 전라북도 강살리기 추진단 상임이사 오문태





2017. 03.24(금)일자 - 교통방송 67회차 질문지(콘티-진안 죽도)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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