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 --경향신문

2016. 12. 2. 10:57시민, 그리고 마을/시민사회운동과 사회혁신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

(40)시대의 구속 넘어 새로운 시대 비추는

 ‘사유의 힘’을 믿는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ㆍ현대의 사상, 사상의 미래

                                                  

지난 3월부터 이 지면을 통해 1946년 경향신문이 창간된 이후 70년 동안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을 돌아봤다. 이제 기획을 마무리하면서 전후 현대사상이 놓였던 자리와 가야 할 길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전후 서구사회의 역사다. 무릇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 사상이 놓인 시대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전후 서구의 역사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사진 왼쪽)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오른쪽)는 2차 세계대전 후 서구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들로 꼽힌다. 미국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운데)는 현대 정보사회를 탐구했다.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사진 왼쪽)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오른쪽)는 2차 세계대전 후 서구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들로 꼽힌다. 미국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운데)는 현대 정보사회를 탐구했다.




서구사회에서 ‘전후(postwar)’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지칭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란 근대 문명의 대규모 파괴를 생생히 경험한 이후 서구사회에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열었고, 서유럽 역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재도약을 이뤄냈다.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는 전후 시대를 자본주의의 ‘황금시대(golden age)’로 일컬을 정도로 풍요와 번영을 안겨줬다. 

1970년대에 들어와 이 번영의 시대는 위기에 빠져들었다. 경제적 침체에 더해 정부 재정 압박에 따른 복지국가의 위기가 가시화하면서 서구사회는 새로운 발전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됐고,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와 함께 신보수주의 시대가 열렸다. 복지국가를 주도했던 사회민주주의는 후퇴했으며, 1980년대 후반 동유럽 국가사회주의가 몰락하게 됨에 따라 신보수주의 시대는 절정을 구가했다. 

이러한 사회변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세계화와 정보사회였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세계화와 1980년대부터 가시화한 정보사회는 1990년대에 들어와 서구 경제·사회 발전의 구조적 조건이자 주체적 원동력을 이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 명명할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은 이제까지의 서구 모더니티를 근본적으로 재구성시켰고, 서구사회를 쫓아온 비서구사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위기에 빠졌다. 서구사회는 이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에 들어선 셈이다. 

미국의 철학자인 존 롤스(사진 가운데)는 ‘정의’를 정치철학 중심 주제로 복귀시켰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위)는 ‘경제적 불평등’을 화두로 부각시켰고, 미국 페미니스트 베티 프리단(아래)은 현대 여성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철학자인 존 롤스(사진 가운데)는 ‘정의’를 정치철학 중심 주제로 복귀시켰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위)는 ‘경제적 불평등’을 화두로 부각시켰고, 미국 페미니스트 베티 프리단(아래)은 현대 여성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시대와 사상 

이러한 역사 변동은 사상의 사회적 배경을 제공했다. 전후 황금시대의 낙관적 분위기를 보여준 저작이 대니얼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었다면, 그 낙관의 그늘을 주목한 저작은 데이비드 리즈먼의 <고독한 군중>이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와 같은 문명사,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와 같은 구조주의,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같은 생태주의,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와 같은 페미니즘,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와 같은 과학철학에 대한 높은 관심은 낙관적 분위기 아래 형성된 상상력과 성찰성의 개화(開化)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이뤄진 사상의 성취는 더없이 다채로웠다. 

이러한 황금시대의 종언을 알린 예광탄은 1968년 ‘68혁명’이었다. 68혁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내재한 국가주의 노선을 거부하고 개인과 사회가 지향해야 할 자율·자치·연대를 부각시켰다. 전후 사상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들은 68혁명의 자장(磁場) 아래 자신의 사상을 펼친 사상가들이었다. 권력의 계보학을 탐구한 <감시와 처벌>의 미셸 푸코와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이론화한 <의사소통행위 이론>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전후 사상을 대표했다. 

서유럽에 푸코와 하버마스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존 롤스가 있었다. 롤스의 <정의론>은 모더니티의 규범적 토대로서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철학을 선사했다. 새롭게 열린 신보수주의 시대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시장의 자유를 강조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법, 입법 그리고 자유>가 그 출발을 알렸다면, 새로운 세습 자본주의의 등장을 예고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그 종말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세계화와 정보사회 또한 적지 않은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가 세계화 담론의 기초를 제공했다면,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과 마누엘 카스텔의 <정보 시대>는 정보사회의 등장 및 역동적 진화 과정을 분석했다.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과 함께 모더니티에 대한 성찰은 1980년대 이후 사상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모더니티에 내재된 유동성을 주목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현대>, 환경 위기라는 모더니티의 결과를 비판한 울리히 벡의 <위험 사회>,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동시에 극복하려 한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대변했다. 16세기에 역사적으로 등장한 서구 모더니티는 이제 새로운 시대로의 질적 변환이라는 문턱 위에 올라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사상의 미래 

이렇듯 사상은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고 성찰하며, 나아가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지난 70년 동안 사상에 부여된 과제는 현대사회를 지속시키고 변화시키는 원리는 무엇인가, 이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바람직한 인류 사회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등을 탐구하고 숙고하는 데 놓여 있었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사상은 시대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새롭게 열릴 또 다른 70년이 어떤 시대가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 시대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우려하는 비관의 시대와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이 예견하는 낙관의 시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시대가 되더라도 사상의 역할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까닭을 나는 이 기획에서 다룬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서 찾고 싶다. 아렌트는 행위하는 복수의 인간들의 소통과 의미 추구를 인간의 조건으로 파악했다. 인간은 시대의 구속 아래 놓인 존재이지만, 인간에 내재한 사유의 본성과 의지는 그 구속을 넘어서는 새로운 자유와 평등에로의 행진을 비출 등불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시리즈 끝> 

■한국 지식인들, 산업화·민주화 이후 시대정신 찾기 과제로…촛불시민혁명에 막중한 임무 느껴

 

이 기획은 세상을 뒤흔든 서구 이론 및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연관된 연구를 수행한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학자들을 소개했다. 

그 순서대로 적어보면, E P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 형성 연구로부터 영향 받아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분석한 구해근(하와이대 교수, 사회학), 페르낭 브로델의 자본주의 문명 연구로부터 자극 받아 서양 문명을 분석해온 주경철(서울대 교수, 서양사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의 아이디어에 착안해 분단체제를 개념화한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영문학),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소개하고 생물학적 발상을 계몽한 최재천(이화여대 교수, 생물학),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론으로부터 영향 받아 일본 식민주의 담론을 연구한 강상중(도쿄대 명예교수, 정치학) 등이 바로 그런 지식인들이었다. 

또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한국적 민족주의의 특징을 주목한 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 사회학)와 신기욱(스탠퍼드대 교수, 사회학), 베티 프리단의 페미니즘 연구처럼 우리 사회 페미니즘 담론을 개척한 이효재(이화여대 교수, 여성학),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론에 자극 받아 우리 사회 민주주의 연구의 초석을 마련한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정치학), 미국 공적 지식인의 새로운 지평을 연 놈 촘스키처럼 한국 공적 지식인의 모범이 된 리영희 선생, 토마 피케티의 불평등 분석을 소개하고 분배의 경제학을 연구한 이정우(경북대 명예교수, 경제학) 등도 있다.

광복 이후 70여년을 돌아보면 서구 사상과 우리 사상 간 시간적 격차는 빠르게 줄어들어 왔다. 그 원인은 우리 사상의 압축적 성장에 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의 압축적 발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탐구는 물론 세계화와 정보사회, 모더니티 등에 대한 분석은 최근 우리 사상의 풍경이기도 하다. 


서구사회에서처럼 사상은 지나온 시대를 성찰하고 새로운 시대를 전망하는 사유를 요청한다. 현재 우리 사상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제가 겨냥해야 할 목표는 제도 개혁과 문화 혁신이라는 이중적 변화다. 이 기획을 진행하는 도중 그 막바지에서 만난 2016년 촛불시민혁명은 이러한 과제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준다. 나를 포함한 지식인들의 일대 분발을 소망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2272037005&code=210100&s_code=af186#csidx5605d69d9f7cab39f67d575b5b7be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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