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을 꿈꾼 조선의 실학자들

2015. 3. 12. 11:04이런저런 이야기/책 속에 길이 있다

 

 

 

 

 

 

소개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지봉유설》을 펴낸 이수광, 평생토록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전을 널리 퍼트린 고집쟁이 김육, 농민들과 직접 농사를 지으며 정전법의 정신을 실현해 낸 유형원, 백성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성호사설》에 기록한 이익, 청나라와 서양의 앞선 문물을 과감하게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박제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꾼 사상가이자 실천가 정약용……. '실패'한 실학자들에게서 우리의 앞날을 헤쳐 나갈 지혜를 찾아보세요.

저자 소개

제주도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에서 천문기상학을 공부했습니다. 과학과 역사가 조화롭게 만나는 지점을 들여다보고, 숨은 역사를 발굴하고, 역사를 보는 새로운 눈으로 독자와 만나기 위해 늘 연구하며 발로 뛰고 있습니다.《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아름다운 위인전》《하늘의 법칙을 찾아낸 조선의 과학자들》《역사를 담은 토기》《역사를 담은 도자기》《문익점과 정천익》같은 책을 펴냈습니다.

목차

조선 후기에 실학이 생겨난 까닭
조선시대 당쟁의 흐름
조선 후기 실학의 흐름

실학의 시대를 알린 선구자, 이수광
고집쟁이 김육이 평생을 바친 꿈
모든 백성이 평등한 세상을 꿈꾼, 유형원
이익이 걸어간 새로운 선비의 길
푸른 눈의 몽상가, 박제가
정약용,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다

작가의 말 _ '실패'한 실학자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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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시대를 알린 선구자, 이수광

이수광(1563년~ 1628년)

(선조)의 임명을 받아 명나라로 떠났다. 이 때 이수광은 베이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조선은 무역을 안 한 우물 안 개구리이다.

이제 우리 조선도 무역을 해 세계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이수광이 벼슬을 시작할 무렵 조정 관리들은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인, 서인을 정리할 것.

동인은 동인의 우두머리의 집이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동인 서인은 경복궁 서쪽에 있어서 서인 이라고 한다.

동인과 서인의 의견은 항상 달랐다. 동인이 옳다. 하면 서인은 아니다. 라고 하였기 때문에 왕의 선택에 따라 왕의 선택과 다른 인은 유배를 가거나 죽었다.

선조-광해군-인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수광과 신흠, 허균, 유몽인의 인생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나?

유몽인은 전쟁을 할 때 조선의 군대에 식량을 주는 관리를 맡았다. 조선의 군대와 명의 군대와 견주어 봤을 때 훨씬 낮은 걸 보고 더 강인한 군대를 만들겠다고 다짐하였다.

전쟁이 시작 되고 명에 지원군을 요청하자 이수광은 명의 베이징의 사신이 되고 베이징이 한양보다. 더 잘살게 되자 그는 조선은 무역을 해 더 선진국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을 소개하기.

그 시대에 쓴 모든 한자들을 써서 한문을 써 그 뜻을 일일이 썼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오늘의 백과사전과 국어사전이다.

P25. 유학은 왜 성리학으로 바뀌었을까?

유교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사상을, 유학은 그런 가르침을 연구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중국에서 유교는 강한 나라를 만드는 법, 백성의 마음을 얻는 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에서 출발했다. 성리학이 마음의 수양과 예의를 강조하다 보니, 점차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 일에는 소홀해 졌다.

<지봉유설> 이후 나온 백과사전들을 모두 써보기.

유현원의 ‘반계수록’이익의‘성호사설’ 영조의 명으로 펴낸 ‘동국문헌비고’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고집쟁이 김육이 평생을 바친 꿈.

김육(1580~1568)

김육은 평생 어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나?

대동법과 동전을 사용한다.

김육의 조상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나?

김육의 외할아버지는 조광조의 후손이고, 김육의 고조할아버지는 김식이다.

조광조도 김식도 모두 기묘사화의 희생자로 억울하게 생을 마쳤고, 그 후손들은 오래도록 벼슬길이 막혔다.

김신국은 김육에게 무엇을 건의했나? 이 방식으로 경제생활이 바뀌면 어떤 점이 좋을까?

김신국은 김육에게 동전을 사용하자는 방법을 건의 하였다. 만약 사회에서 동전을 사용하게 되면 흉년에도 풍년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삼베처럼 못쓰게 되는 경우도 없어질 것이다.

양반들은 동전의 사용을 왜 반대했나?

양반 사대부들이 동전을 반대한 까닭은 재산 대부분을 토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전이 널리 쓰이면 농업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부자들이 나타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P53. 조선시대의 세 가지 세금은 무엇인가?

조선시대 모든 양인들은 전세와 공물과 역, 이렇게 세가지 세금을 내야 했다.

P55. 대동법의 역사를 정리하기.

대동법을 처음 건의 한 사람은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제도를 바꿀 것을 건의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1570년 율곡 이이도 대동법을 재정하려 했지만 반대가 심하여 실현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유성룡, 한백겸, 이원익이 주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였지만 상인들의 수가 적다보니 물건들을 많이 구해오지 못해 폐지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동법을 ‘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반대가 심하여, 경기도에서만 시행되었다. 공물을 대신하여 쌀로 바꾸어 관청에서는 이 쌀로 필요한 물건을 사드렸다.

인조도 ‘신혜법’을 전국에 퍼뜨리려 하였지만, 반대가 너무 심하여 3년 만에 포기하였다.

그러나 경기도와 강원도에서는 대동법이 편리하니 없애지 말자고 요청하여, 2곳만이 신혜법을 실행하였다. 효종 (1652)때 충청도 1657년 전라도 1677년 경상도 마지막으로 1708년 황해도로 실시되어 마침내 전국에서 시행되었다.

대동법의 결과. 왜 실패했나?

부자들이야 대동법 때문에 내야 할 세금이 많아져 반대하고 가난한 농민들은 먹을 쌀도 없는데 쌀로 세금을 내라고 해서 반대.

실학의 역사에서 김육은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조선시대 실학은 김육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화폐로 상업을 발달시켜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믿음이 뒷날 많은 실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모든 백성이 평등한 세상을 꿈꾼 유형원

유형원( )

병자호란 후 조선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정리하기.

백성들은 관리들에 대한 복수심에도 불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렇게 큰 전쟁이 두 번 이나 일어나자 백성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복수심도 있었다.

정전법의 제도를 설명하기.

정전 우물정 밭전 글자 그대로 밭은 우물 정 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한 것을 말한다.

양반들은 왜 대동법을 반대했나?

공명첩 설명하고, 조선 후기 왜 양반이 비율이 많아졌는지 설명하기.

공명첩은 이름 쓰는 곳이 비어있는 채 만들어진 임명장으로, 관직을 주거나 노비에서 풀어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빈칸에 이름만 쓰면 신분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중이나 전쟁 뒤 가뭄이 심한 경우 조정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매우기 위해 공명첩을 발행했다. 조선 초기에 국민의 10% 미만이어던 양반의 비율이 조선 후기엔 공명첩을 마구 발행하여 50% 가까이에 이르게 되었다.

<반계수록>의 내용은?

반계수록에서 정전법의 기반을 두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게 다듬은 공전법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공전은 토지는 나라의 것이라는 뜻이다.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므로 토지도 백성의 것 이라는 것이다. 모든 백성이 공평하게 나라를 지키는 평등한 세상이 공전법이 원하는 세상이다.

 

 

 

이익이 걸어간 새로운 선비의 길

이익(1681~1763)

이익은 왜 과거시험을 포기했나?

이익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지않는 관리는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익이 생각하는 경전이란 어때야 하나?

이익은 경전은 경전일 뿐, 세상이 변하면 경전 내용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환곡에 대해 설명하기.

원래 환곡은 풍년에 걷은 쌀을 흉년에 빌려주고 이듬해 가을에 갚게 해서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제도이다.

이익이 생각하는 진정한 선비의 길은 무엇인가?

진정한 선비라면 착한마음으로 백성을 돌보아야 한다.

이익의 제자들은 어떤 활약을 했는가?

안정복, 권철신, 신후담이 이익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더러는 아예 이사를 오기도 하였다. 이익에게 배운 조카 이병휴, 이용후 그리고 손자 이구환 이가환과 손자뻘인 이중환 등이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학자가 되었다.

<성호사설>의 내용은?

이익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농민들에게 영업전이라는 토지를 나눠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푸른눈의 몽상가, 박제가

박제가(1750~1805)

박제가는 왜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나?

정조 때 서자를 과거 시험을 보게 할 기회를 주기 전이어서 서자는 출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P131의 홍대용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리하기.

홍대용은 청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정하였다.

<북학의>란 말의 뜻

발달한 청의 문물을 받아 들이자라는 뜻이다.

<북학의>의 내용은?

북학은 청나라를 변화시킨 새로운 기술 문명을 뜻하며 의 는 제도 기술 도구 기구를 가리킨다. 따라서 북학의 란 북경을 변화시킨 새로운 기술과 제도를 의미한다.

박제가가 꿈꾸는 것은 무엇과 무엇이 사용되는 나라인가? 이 두 가지 물건이 어떻게 나라를 바꾼다고 생각했는가?

벽돌과 수레이다. 벽돌은 집을 짓고 담을 쌓으면 오래가고 튼튼하며 깨끗하면서도 비싸지 않는다. 무엇보다 벽돌의 힘은 길에 있다. 길을 벽돌로 만들면 수레가 다니기 편합니다.

 

 

 

정약용,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다.

정약용(1762~1836)

거중기에 사용된 도르래는 예전에도 사용되었던 도구. 그 역사를 정리하기.

도르래는 오늘날에도 공사를 할 때 무거운 돌을 들을 때 도르래를 컨테이너에 달아 들어올린다. 컨테이너는 거중기가 더 커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수원화성에 성호학파는 어떤 역할을 했고, 북학파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쓰기.

자와 저울은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

임금이 넓은 지역을 다스리려면 세금을 공평하게 받아야 하기 때문에 곡식이나 옷감을 재는 데 필요한 도구, 곧 도량형이 발닳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나라에서 정한 규격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고려시대가 끝나 갈 무렵 귀족들의 힘이 세지면서 도량형은 제각각이 되어버렸다. 빌려 줄 때와 받을 때 길이와 부피를 다르게 하여 농민들을 괴롭힌 것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세종임금이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도량형을 통일한다. 무게, 부피, 길이 심지어 악기 소리까지도 표준 규격을 정했다. 이것이 성종임금 때에 <경국대전>에 실려 법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제각각이 되어 버렸고, 영조 임금때 정비를 했지만 여전히 무게와 부피와 길이를 속여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걷는 일이 계속 되었다.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당시 암행어사들은 마패와 함께 자를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정조가 죽은 후 정약용은 왜 유배를 가야했나?

정조가 죽은 뒤 왕위에는 순조가 오르고 권력은 정순왕후가 잡았다. 권력을 잡은 정순왕후는 실학자들을 유배시키거나 사형하였다.

<경세유표>의 핵심내용 세금을 공평하게 걷는 데 있다.

<목민심서>의 핵심내용고을 수령들이 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지침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흠흠신서>의 핵심내용 곡산 부사로 있을 때 특별히 재판을 잘 처리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정약용은 1799양4월에 형조참의가 된다. 형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법에 따라 공정한 조사와 재판과 형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1819년에 흠흠심서를 지었다.

 

 

홍대용: [洪大容 1731∼1783(영조 7∼정조 7)]

조선 후기 실학자. 자는 덕보(德保), 호는 홍지(弘之). 본관은 남양(南陽). 당호(堂號) 담헌(湛軒)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학자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북학파(北學派) 계열 실학자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과 친분이 깊었다.

1765년(영조 41) 서장관(書狀官)인 작은아버지 억(檍)의 수행관으로 베이징[北京]을 방문,
중국학자들 및 독일계 선교사들을 만나 서양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귀국 후 과거에 여러번 실패한 뒤,
74년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유학보다도 군국(軍國)·경제에 관심이 깊었고, 신흥 상공인의 입장에서 사회개혁사상을 폈다.
그는 조선시대 제1의 과학사상가로 수학의 원리 적용, 천문, 측량도구에 대한 해설을 담은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하였고,
천체·기상 해설서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는 지구의 자전을 주장하였다.

한편 농촌에서 양반관료의 농민에 대한 횡포를 막기 위해 균전제(均田制)·부병제(府兵制)를 주장하였고,
신분제도 개혁을 위해 과거제를 폐지하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및 신분에 관계없이 8세 이상 모든 아동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 개혁사상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근대 개화사상에 밑거름이 됐으며 박지원·박제가 등에게 이어져 북학파의 선구를 이루게 되었다.
그 밖의 저서로 《담헌설총(湛軒說叢)》이 있으며, 편저로 《건정필담(乾淨筆談)》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항전척독(抗傳尺牘)》 《삼경문변(三經問辨)》 《심성문(心性問)》 《계방일기(桂坊日記)》 등이 있다.

 

 

※ 박지원: [朴趾源 1737∼1805(영조 13∼순조 5)]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본관은 반남(潘南). 서울 출생.

- 16세에 처삼촌인 영목당(榮木堂) 이양천(李亮天)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0대에 이미 뛰어난 글재주를 보이게 되었으며,
- 30대에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박제가(朴齊家)·홍대용(洪大容)·유득공(柳得恭) 등과 사귀었다. 과거에 뜻을 버린 채로 곤궁한 생활 속에서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 1780년(정조 4) 팔촌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청(淸)나라의 진하사절(進賀使節)로 베이징[北京]에 갈 때,
사행(使行)을 따라 중국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돌아보게 됐고 이때 청나라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연행(燕行)을 계기로 하여 충(忠)·효(孝)·열(烈) 등과 같은 인륜적인 것이 지배적이던 전통적 조선사회의 가치체계로부터 실학(實學),
즉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물질적인 면으로 가치체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연행 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어 이용이 있은 다음에 후생이 있고,
후생이 있은 다음에 도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비록 이적(夷狄)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여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86년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어 늦게 관직에 들어서서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면천군수(沔川郡守) 등을 거쳐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문장가로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정아(精雅)한 이현보(李賢輔)의 문장과 웅혼(雄渾)한 그의 문장은 조선시대 문학의 쌍벽으로 평가되고 있다.
희화(戱畵)·풍자(諷?의 수법과 수필체의 문장들은 문인으로서의 역량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1910년(순종 4)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도공(文度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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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이란?
1.실제 쓰임에 이롭고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

   이용후생의 학문
2.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의 학문


*실학이 생겨난 배경
[조선후기의 사회모습]
`이론과 예법을 둘러싼 논쟁으로 대립함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용적 한문에 힘쓰지 못함
`서양 문물의 전래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됨
`왜란과 호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짐
[실학의 발생]
`정치 분야 - 지방관은 백성을 위해 일을 해야 함
`경제 분야 -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만 토지를 가지게 함
화물을 나를 때에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유리함
`사회 분야 - 신분 차별을 없애고 노미를 해방시켜야함






*실학자와 업적
1.농업 연구
`유형원 -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농민에게 농사지을 땅을 줄 것을 주장함
'반계수록' 저술
`이익 - 농민의 입장에서 개혁 방법을 제시함
'성호사설' 저술
`정약용 - 토지 제도와 세금 제도의 개혁을 주장함
2.상공업 연구
`유수원 - 상공업을 통해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의 개혁을 주장함
'우서' 저술
`박제가 -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중국의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함
'북학의' 저술
`박지원 - 상업기술 익히기를 권장하고, 화폐 사용을 강조함
'열하일기' 저술
3.과학과 기술 연구
`홍대용 - 서양의 근대적 천문학에 관심을 가짐[지동설 주장]
'의산문답', '담현서' 저술
`정약용 - 실학 연구를 집대성함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음
4.역사, 지리, 언어 연구
`유득공 - 발해의 역사를 우리 나라의 역사로 다룸
'발해고'저술
`김정호 - 직접 해안을 걸어다니고 높은 산에 오르며 '대동여 지도'를 완성함
`유희 - 한글의 우수성을 중국 글자와 비교해서 강조함
'언문지' 저술
*실학의 결과
1.실학의 영향 - 화폐의 전국적 유통, 신불 제도의 개혁 요구, 대동법의 실시 등
2.역사적 의의 - 중국 중심의 세계관 탈피, 현실적 & 과학적 & 객관적인 학문 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