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1 14:45
엔지니어의 인문학 수업 - 르네상스인을 꿈꾸는 공학도를 위한 필수교양
새뮤얼 C. 플러먼 지음, 김명남 옮김, 유유, 2014.06
낭비된 시간들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서 사람들이 종종 떠올리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이지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난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엔지니어의 인문학 수업>의 저자 새뮤얼 플러먼은 대학 시절에 본인이 ‘가지 않은 길’ 혹은 ‘가보지 못했던 길’에 대한 아쉬움을 잘 기억합니다. 1943년, 당시 다트머스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던 플러먼은 반주지주의(anti-intellectual), 그러니까 지식인에 대한 반감과 인문학에 대한 멸시 경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학과 과학 공부에만 몰두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영화, 스포츠 행사, 여학생들에만 관심이 있었지요. 다트머스대학은 역사, 철학, 문학 등 ‘교양’(혹은 인문학) 강의들도 충분히 제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캠퍼스에서 열리는 강연회, 콘서트, 연극 공연 등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요.
그 해에 다트머스대학에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로버트 프로스트가 초대되어 와서는 특별강좌를 개설했었습니다. 중퇴하긴 했지만 프로스트는 이미 시 부문에서 퓰리처 상을 네 차례나 수상하는 등 다트머스대학을 대표하는 명사 중 한 명이었으니까 자격은 충분했습니다. 플러먼의 기숙사 친구 중 한 명이 그 특별강좌를 수강하였습니다. 이 친구는 프로스트와 함께하는 낭독회나 토론회에 몇 번이나 플러먼을 초대했지요. 그러나 플러먼은 실험일지를 쓰거나 선술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열중하느라 너무나 바빴습니다. 그는 약 45년 후에 그 일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로버트 프로스트를 본 적조차 없을 뿐 아니라 그와 저녁을 보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말로 믿기지 않는다.”
소통과 교감이라는 태도
플무엇을 아쉬워하고 있는 걸까요? 단지 유명 작가와 저녁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 시인의 말을 직접 들을 기회를 놓친 것? 1987년에 출간된 <교양있는 엔지니어>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스스로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 특히 자신이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혼, 위대한 사색가, 위대한 예술가들과 교감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지도자가 될 엔지니어, 중요한 사회적 논쟁에 참여하게 될 엔지니어는 우리 문화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사상과 이론 그리고 철학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플러먼은 위대한 영혼, 위대한 사색가, 위대한 예술가와 직접 교감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허비해버린 것을 아쉬워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교감’이라는 단어 선택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이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넘어 교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엔지니어의 인문학 수업>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엔지니어(더 넓게 잡아 이과대학과 공과대학 출신들)들에게 교양-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피상적인 세련됨이나 파티에서 주목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많은 이들과 교감하고 소통하기 위해서지요. 플러먼이 보기에 엔지니어들이야말로 세상을 유지하고 보수하고 혁신하고 전진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자체를 생산해내고, 그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사람들이지요. 그렇지만 리더십이 없습니다. 엔지니어들이 교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갖지 못할 때, 자기 스스로 리더십을 갖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플러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엔지니어가 리더십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재능은 지금처럼 계속 낭비되고 오용될 것이다. 세상은 엔지니어의 용광로를 원하지만 매연 억제 도구는 원하지 않을 테고, 고속도로를 원하지만 공원은 원하지 않을 테고, 폭격기를 원하지만 병원선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고삐 없이 날뛰며 발전하는 기술은 아스팔트와 무기, 오염과 황폐의 저주를 낳는 질병이다.”
고삐 없이 날뛰며 발전하는 기술의 폐해. 이것은 엔지니어들의 책임이라고, 플러먼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엔지니어들이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한 덕분이지요. 생각하는 엔지니어라면 기술의 성공을 그냥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전문 기술인으로서 이 직업의 철학적 토대를 탐구하고 정의하고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강화해야 하는 겁니다. 인문학의 눈으로 기술과 공학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 성찰이 부족한 엔지니어들은 기술이 저절로 발전하고 성공을 거둘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몫만 다하면 된다는 식이에요. 그렇지만 ‘기술의 폭주’를 말하며 열거한 용광로와 매연 억제 도구, 고속도로와 공원, 폭격기와 병원선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 기술이 정말로 삶과 사회에 유용하기 위해서는 선택이 필요하고 또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균형을 위해서 설득이 필요하지요. 기술과 관련된 중요한 사회적 논쟁에 참여해서 논쟁의 상대편과 다른 전문가들, 그리고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소통과 교감의 능력, 아니 소통하고 교감하겠다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교양-인문학이란 바로 그 소통과 교감의 능력이자 태도입니다.
현대 인문학의 여러 꼴: 역사, 문학, 철학, 미술, 음악
플러먼은 역사, 문학, 철학, 미술, 음악 등 다섯 개 분과를 교양-인문학의 대상으로 제안합니다. 각 분과마다 먼저 ‘다리’를 놓고(‘문학으로 가는 다리’라는 식입니다. 정말 토목기사답지요!) 거기서 ‘기술’과 해당 분과 사이의 접점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공학도로서, 엔지니어로서 각 분과를 보는 시야를 제안합니다. 역사, 문학, 철학, 미술, 음악에 대해 엔지니어로서 관점을 잡고 기본적인 시각을 제안하는 파트인 것이지요.
이 ‘다리’ 부분은 오히려 기술과 공학 등에 무지한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기술과 공학의 뿌리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이렇다 하는 것을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요(인문학이란 결국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일 테니까요). 플러먼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핵심에 빠르게 도달하는 게, 오히려 인문학 전공자들의 정리보다 훨씬 간결합니다. 다트머스대학에서 토목공학 학사학위를, 콜롬비아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공학과 인문학 양 진영을 오가며 대화를 시도하고, 요령 있게 핵심을 쟁취해 제시합니다. ‘음악으로 가는 다리’ 부분에 나오는 이런 문장들은 공학과 인문학 양쪽에 뿌리박은 저자의 상상력이 얼마나 근사한지 잘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엔지니어가 쾌적한 소리를 장려하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될 방법이 없고 불쾌한 소리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문제에서 엔지니어에게는 최종 권한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영향력이라도 조화롭고 사랑스러운 소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교차로나 인도의 작은 광장을 설계할 때 분수를 포함시키는 것, 큰 광장에 연주용 단상을 설치하는 것, 공업단지가 새들의 서식지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일부를 보존하는 것, 도시 재생 계획에 슬쩍 종탑을 끼워 넣는 것. 이런 방법으로 음악에 민감한 엔지니어는 아름다움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명작 고속도로’ 위의 외유
이 ‘다리’를 건너고 나면 각 분과 세계로 진입합니다. 역시 공학도의 눈으로, 엔지니어의 눈으로 번안하고 정리한 각 분과별 역사와 베스트, 추천 리스트가 빼곡합니다. 저자는 명작이니까 무조건 다 읽어야 한다, 알아야 한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충고를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명작을 나열하고 독자에게 권하면 그만큼 안전한 일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저자가 ‘명작’이라는 고속도로에서 살짝 비켜 서있는 건 문학에는(다른 모든 분과와 영역에서도) 이름난 권위자들이 인정한 길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탐사해볼 만한 샛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저자의 엔지니어적 속성에 기인하는 바) “고대 작가는 꿈도 꾸지 못했을 법한 경치를 보여주는 새로운 길이 우리 시대에 많이 닦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풍경들을 마주 대하게 되었지요. 그런 점에서 옛 고전만을 따라가는 건 위험하고 지적으로 게으른 일입니다. 변치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송두리째 변해버린 것들도 많으니까요.
문학을 예로 볼까요. 전부 86쪽, 작고 얇은 문고본 한 권도 안 될 분량 안에서 플러먼은 55개의 소제목을 늘어놓고는 능청스럽게 서구 문학사 전체를 정리해버립니다. ‘책 중의 책’ <성서>로부터 시작한 문학사는 20세기 미국의 우파 작가인 허먼 워크의 <케인호의 반란>에서 끝이 나지요. 평가들은 신랄하고 또 유머러스합니다. 가령, <돈키호테>는 ‘지극히 읽기 힘든 책’이라고 얘기합니다. “지나치게 길고, 너무 느긋하고, 지루하게 곁길로 빠진 이야기가 가득하다”면서요.
<파우스트>에 대해서는 좀더 가혹합니다. 저자의 문체는 이럴 때 군더더기가 전혀 없습니다. 핵심 정리의 달인 같은 솜씨예요.
“현대인은 끊임없이 갈구하고 결코 여유나 만족을 모른다는 의미에서 ‘파우스트적’ 인간이라고 불리곤 한다. 파우스트는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문화와 어휘를 살찌운 또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자에게 <파우스트>는 심지어 <돈키호테>보다도 읽기가 어렵고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세르반테스나 단테의 경우처럼 <파우스트>도 번역이 문제일 수 있으나, 전적으로 번역 때문일 리는 없다. 호메로스처럼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재미나게 읽히는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파우스트>가 남긴 인물과 전설에 감사하되 작품 자체는 비껴가도 괜찮을 것이다.”
대단한 배짱이지 않습니까. 서양의 고전 중에서도 앞자리를 다투는 <파우스트>를 백과사전식 정리 요약으로 대해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 시간과 노력으로 다른 것을 읽으라고 권하지요.
Photo : Fast Company (http://goo.gl/M5WJoA)
<엔지니어의 인문학 수업>이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이들에게 권할 만한 책입니다. 1968년에 나온 책이라 진부하다고 느낄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지식계가 좀더 소박하게 운영되던 때의 정리 작업이라 그만큼 더 핵심에 가깝고 간결하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1968년 이후의 것들은 독자 스스로의 몫으로 남겨둬도 좋지 않을까요. 저자가 밝힌 이런 원칙에 따르면서요.
“이른바 ‘가치 있는’ 작품만 골라 소개하는 안내를 따를 것인가, 자기 자신의 취향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당연히 둘 다 따라야 한다. 널리 인정되는 걸작을 무시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자신의 취향이란 다르게 보면 곧 자신의 무지와 편견이므로 자신의 취향만 온전히 따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남을 따라다니기만 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취향에 좀더 어려운 과제를 부여하고 좀더 세련되게 다듬고 확장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자신이 취향을 가지고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케케묵고 진부한 신전에 무조건 경배해야 할 의무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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