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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4-10. 진보의 10대의제 :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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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4-10. 진보의 10대의제 : 비정규직

윤금옥씨(47)는 9년째 ㄹ호텔 룸메이드로 일하고 있다. 50개 가까운 비품을 챙기고 45가지 사항을 점검하는 특급호텔 방 정돈이 호텔의 얼굴을 만든다며 자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2001년 이후 달라졌다. “호텔에서 룸메이드 업무를 외주화한다고 했어요. 2년간 고용도 보장해주고, 임금도 직접고용 수준으로 주겠다고 했죠. 100여명이 동의했어요. 외주화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했지요.”

이후 간접고용으로 바뀌었고 4년 동안 용역회사는 4번이 바뀌었다. 월급은 3년간 동결. 지난해 ‘일일 4시간 근무’로 계약된 룸메이드가 손에 쥔 기본급은 47만원. 월급은 많아야 1백만원. 신입은 60만~80만원이다. 정규직이었을 때는 연봉이 3천만원까지 올라갔었다. 불만의 기미가 보일 때면 회사측에서는 “아쉬워서 여기 일하는 거 아니냐”며 고용문제를 들먹였다. 지난 가을, 한계에 달한 룸메이드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평범한 아줌마였던 윤씨는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원청업체에서 하청업체를 또다시 바꾸는 과정에서 그를 포함한 9명은 노조 핵심 인사라며 고용승계를 하지 않았다. 윤씨는 뒤늦게 후회했다. “괜히 노조를 만들었나 봐요. 노동청에서는 ‘우리도 방법이 없다’며 도움을 못주더군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기륭전자의 김소연 분회장은 중소·영세기업의 현실을 이렇게 전한다. “요즘 1년짜리 파견계약이 어딨어요. 3개월, 6개월짜리가 넘쳐나요. 정규직인데도 아침조회 시간에 ‘아르바이트’로 일하라고 일방적으로 회사에서 통보를 하기도 해요. 그래도 울며 겨자먹기죠. 딱히 일자리가 없으니까요.”

구로단지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기륭은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서도 도급회사 4개 업체에서 노동인력을 공급받고 있다. 김분회장은 “인건비를 줄이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막으려는 위장도급”이라고 주장했다. “상여금은 꿈도 못꿔요. 특근 안하면 생활이 안돼요. 1주일 내내 일해야 1백만원쯤 받아요. 회사도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요.”

근시안적인 경영이 근로의욕을 꺾는다고 김분회장은 말했다. “그전에는 문제 있으면 ‘불량이다’ ‘고쳐달라’ 말할 수 있었지만, 파견이고 보니 내 회사라는 인식이 없어요. 그런 회사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겠어요.” 현재 구로디지털단지 내에서는 20~30명되는 사업장에서도 파견직을 쓰는 경우가 많다. 쉽게 자르고, 다시 쉽게 고용하기 위해서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한 고용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경제·사회적 불안 요소로 연결된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의 비정규직 비율은 평균 15%지만 한국은 50%를 넘는다.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는 비정규직이 결코 ‘싼 값’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비정규직 증가는 단기적으로 기업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이 늘어납니다. 실업률, 소득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범죄, 질병, 이혼, 자살 등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죠. 이는 복지비용이 늘고 그만큼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근로의욕, 기업의욕도 해칩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는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비정규직 3개 법안은 노동계에서 ‘개악안’으로 평가받는다. 민주노동당 이상훈 정책연구원은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기한을 2년으로 정한 것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증가시킬 뿐”이라며 “사용사유를 제한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법안이 국회에서 쉽게 통과됐다. 그 배경에는 비정규직 문제를 제대로 의제화하지 못한 진보세력의 잘못된 접근법이 있다. 이상훈 연구원은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 양극화에 대한 해법이라는 것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단순히 노동권 문제로 협소하게 접근했다”고 반성했다.

취임 초기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노동계에 기대를 품게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의 정책 방향이 신자유주의 기조로 바뀐 것도 노동계의 입장을 더욱 고립시켰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 오민규 사무국장은 “2004년 9월 이번에 통과된 법안이 제출되면서 노동계와 선긋고 가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한국비정규센터 남우근 사무국장도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닌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측면으로만 접근했다”고 지적했다.

노동운동의 중심 세력인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비정규직 문제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도 문제다. 민주노총 조합원 중에서 정규직의 비중은 90%에 이른다. 오민규 사무국장은 바로 이런 점이 “민노총과 민노당의 심각한 위기”라고 주장한다. “강한 노조를 갖고 있는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희생하는 조건으로 고용조건과 임금을 보장받는 데 합의합니다. 사용자와 정부도 이 같은 관리 방법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비정규직은 스스로 문제를 푸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오민규 사무국장은 “비정규직이 노조를 결성, 요구하는 바를 이뤄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의 조직화는 물론 쉽지 않다. 비정규직이 노조를 결성하면 바로 해고당하고 아웃소싱업체는 계약을 해지당한다. 그래도 비정규직의 조직화가 ‘더디 가지만 가장 빠른 길’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전환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 교수는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 전체를 불안하게 만들고 위기로 빠뜨리는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면서 “ 기업, 노조, 시민 사이에서 단기 기업 이익이 아닌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민영·임영주기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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