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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사회적 ‘대타협’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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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사회적 ‘대타협’ 하자

     

        

지난달 27일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상임집행위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단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우리 노동운동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노동 내부에서 보다 밖에서 더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일면 분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민주노총이 사회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죠.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실정과 다르더라도 이를 극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노동운동이 어려울 때 큰 역할을 했던 현대자동차 노조가 노동운동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나서주길 바랍니다.”

2004년 6월 4일 첫번째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앞서 참가자들이 손을 마주 잡고 있다. 왼쪽부터 박용성 대한상의회장, 김금수 노사정위원장,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김대환 노동부 장관, 이수영 경총회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대차 노조가 사회적 연대를 위해 ‘국민연금보험료 지원방안’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규직 노동자가 자기 몫을 줄여 저소득 노동자를 도와주자는 제안이다.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저소득 노동자는 4백23만명. 이들에게 2008년부터 5년간 보험료를 지원하려면 최소 8조5천억원이 소요된다. 이중 3조원은 정규직 노동자가 미래 급여를 줄여 마련하고 나머지는 고소득자의 보험료 누진율을 올리고, 국민연금기금 이자 차익으로 충당한다는 구상이다. 그리고 대형 사업장 중심의 불평등한 임금인상 방식을 수정해 임금격차를 완화하고, 노동자들의 세금 기여 확대를 통해 고소득자들의 의무를 더 크게 요구하는 부유세 도입 등도 추진할 계획이다.

민주노동당의 이 사회적 연대방안은 국가와 자본을 상대로 양보를 요구하고 투쟁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희생을 통해 사회적 타협을 유도하고 주도해 나가겠다는 진보진영의 대담한 최초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노동계의 반응은 미묘하고 복잡하다. 민주노동당이 산별노조 대표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했을 때는 “우리(노조)가 의사협회나 약사협회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긍정론이 나왔다. 그러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보수적인 ‘노동 때리기’에 동조하는 꼴” “정부의 반노동 정책이 노골화된 시점에 어울리지 않는 제안”이라는 비판도 많다. 이런 반응에서 보듯이 사회적 타협을 위한 한국 사회의 토대는 매우 취약하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절대적 우위, 노동과 정부 간의 불신과 배척, 정부의 노동배제 정책, 낮은 노조 조직률, 노동계의 대표성 문제, 내부 정파갈등 등 ‘숙제’가 산적해 있다. 그리고 “정부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능력도 의지도 철학도 없다”(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교수). 자본은 “노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사회적 타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진보정치연구소 조진한 상임연구위원).

노·사·정간 사회적 타협을 위한 첫 시도는 1998년 1월 외환위기를 계기로 출범한 노사정위원회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위기는 고용불안과 대량실업, 대외신인도 추락, 정치·사회적 균열을 유발했다. 그러자 세 사회 세력인 노·사·정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다음해 2월 민주노총은 ‘정리해고 수용’이라는 ‘아픈 상처’만 간직한 채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정부의 노동배제적 정책이다. 노동과 자본을 중재할 만한 ‘공정한 조정자’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노동운동 세력에 대한 인내심 부족 끝에 적대정책으로 돌아섰다. 초기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을 기치로 내걸고, 노동계의 원로인 김금수씨를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하는 등 사회적 타협 의지를 보였던 참여정부였다. 하지만 2003년 6월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으로 정부는 인내의 한계를 예상보다 빨리 드러냈다. 특히 2004년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정부는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2·8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그해 10월에는 양대 노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안을 국회에 상정, 완전히 등을 돌렸다. 참여정부 초기 노사개혁TF팀장을 지낸 박태주 교수는 “이 정권에서 사회적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 이유는 참여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보고서는 민주노총을 ‘암적 존재(scourge)’로 규정하고 ‘죽음에 이르는 파업전략(strike to death strategy)’을 구사한다면서 민주노총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냈다. 민주노총의 참여를 배제한 채 한국노총과 협의를 거쳐 확정된 비정규직 보호법을 두고 “충분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 명실상부한 사회적 대화의 결과물”이라는 청와대 국정브리핑의 주장은 현정부 노사관계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진한 연구위원은 “정부는 한쪽 팔로는 재벌을 껴안고 한쪽 발로는 노동을 차고 있다”면서 “노대통령은 취임 이후 재벌들과는 수차례 회동했지만 노동계와 직접 만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대화와 타협을 위한 준비가 부족하기는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내부 정파갈등, ‘총파업’ 관행에 따른 경직성과 전략적 판단 부재로 대화의 분위기를 조성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2005년 사회적 대화 체제로 복귀를 선언한 지도부를 당선시킨 이후에도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하려던 대의원대회를 연이어 세 번이나 폭력사태로 무산시켰다. 이는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가속화시켰다. 당시 위원장이던 이수호씨는 지난달 30일 “정파적 대립구도 때문에 ‘사회적 타협’은 훼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결국 무조건 싸워야 한다는 강경론만 우세해진다”고 비판했다. 정부의 반(反) 노동정책에 총파업으로 맞서고, 대중은 지치고 파업의 의미는 사라지면서 노동세력은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고 해서 ‘사회적 타협’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먼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다. 박태주 교수는 “노·사·정이라는 사회적 주체가 세계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 대화하며 타협하는가에 따라 세계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야말로 ‘87년 노사관계 체제’를 ‘2007년 체제’로 이행시킬 핵심적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특히 박교수는 “세계화에 대한 노동조합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정부와 사용자측이 추진하는 세계화 전략은 노사관계의 덫에 걸릴 수 있다”며 정부의 노동정책 전환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사회 세력간 타협은 양극화나 비정규직 양산 등으로 상징되는 사회해체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분열과 대결 구도에서 심화되는 ‘노동의 고립’ 현상을 그대로 두고는 그런 사회문제를 풀 방법이 없다. 그런 조건에서는 노동자의 이익을 실현시킬 수도 없고, 사회적 발전도 이룰 수 없다.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노·사·정·민 간의 사회적 대타협 없이는 진보적 사회발전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노동문제는 노동자라는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노동문제는 사회적 갈등의 축이자 원천으로서 사회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이다. 노동문제로 인한 갈등은 사회 평화, 산업 평화를 깨뜨리고, 이념적 대결을 부추기며 적대적 정치의 토양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회적 대타협은 생산, 사회복지, 대화의 정치, 진보적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노동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많은 것들을 풀 수가 있다”면서 “그러나 이것을 못 풀고서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회적 타협의 제1조건인 노동정책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정부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 절실하다. 노동계의 변화도 요구된다.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사회연대 전략의 성패는 노동계의 전략적 판단이 가능한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오건호 전문위원은 “(노동계도) 사회적 대화와 조정을 거부하면서 스스로에게 맨 족쇄를 풀고 진취적으로 가야 한다”며 “사회적 연대전략은 총파업 같은 ‘기동전’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정책적 콘텐츠와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진지전’을 병행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영환기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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